인도 중부 왕사성(라즈기르) 북쪽에 있는 숲을 시다림(시타바나, 尸茶林)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달린다’의 명사형 ‘시달림’으로 자주 쓰는 말의 원형이다. 시다림은 일종의 공동묘지로 사람이 죽으면 이 숲에 내다버리게 되는데, 내다버림을 당한 시신들은 곧 새들의 먹잇감이 되어 일종의 조장(鳥葬) 또는 티벳의 천장(天葬)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장례의 한 형태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공포감과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아수라 같은 상황이다 보니 인도에서는 기꺼운 수행의 장소로 돼버렸는데 그 말의 씨가 자라나 오늘날 성가시거나 괴로움의 표상으로써 ‘시달린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죽음의 물리적 고통을 주검을 통해 극복하려는 수행자들의 각오에 찬 의미로 재고할 수 있지만, 좀 더 약화된 의미로 시다림을 다시 한 번 뇌까리는 이유는, 인천을 공부하다보니 문득 사방천지가 공동묘지였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이 근대 개항장으로 설정되고 각국 주재원들이 속속 상주했을 당시 불의의 죽음을 맞은 자국민을 현지에 매장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을 것이다. 하여간 1883년 7월 만석동 북성고지 일대에 서양인 매장자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인천이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인을 위한 묘지가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단초가 된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가 1890년에 조선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최초의 매장자인 미국인 선교사 존 W. 헤론이 묻히기 전까지 만석동 외국인묘지가 약 7년간 유일한 외국인묘지인 것이다. 닥터 알렌의 ‘한국보고서’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제물포까지 운구하는데 관에 소금을 채워가는 일도 번거롭지만 거리도 멀다”고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매장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천이 정식으로 개항하기 전인 1882년, 이미 인천에 입국한 일본인들의 경우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의 전통적인 화장 풍습에 익숙하지 않은 인천 사람들의 원성과 일본인들만의 묘지의 필요성에 의해 현재 신흥초등학교와 송도중학교 그리고 인천여상을 삼각 구도로 해서 그들만의 묘지와 화장장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율목동 인천시립도서관 북편, 광성고등학교 북편에도 각각 화장장과 묘지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미국 감리회 소속 내리교회와 영국 성공회 교회 사이의 구릉을 ‘의장지’라 부르며 멋대로 묘지를 만들었는데, 향후 인천 감리서와의 협약에 따라 인천부내 중심 십리 밖에 묘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현재의 선인학원 재단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부평공동묘지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조사과정을 거치면서 문득 제 땅이면서 제 땅에 제대로 묻히지 못했던 인천 사람들의 허망함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함으로 가슴팍이 무겁게 짓눌려짐을 느끼게 된다. 조계설정에 따른 이장의 요구는 더욱 답답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몇몇 문학작품에 거론되는 신흥동, 도원동 일부와 신기촌 등이 당시 인천(제물포) 사람들의 최후의 안식처였던 것을 감안할 때, 요즘 인천 전역에서 벌어지는 동시다발적인 행사들과 쉽사리 마음이 섞이질 않고 있다. ‘집(삶)을 짓기 전 양택을 해야 하고 토대를 단단히 갖추고 난 다음 주변과는 잘 어우러져 지었는가’하고 일찍이 임원경제지를 지은 풍석 서유구 선생은 다소곳하게 말씀하신다.
도처가 시다림(尸茶林)이다. 물불 안 가리고 앞 뒤 안 보고 내치는 망아지처럼 개발과 과시와 향연의 말발굽을 사방팔방에 찍어대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 게 다 내 이웃이 한 일이고, 기밀스럽게 모두 나와 사슬처럼 연결된 일이다. 그래서 누웠더라도 옹알이만 할 따름이다. 신 시다림에 앉아 21세기를 보내는 헌 구도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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