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태를 상위적 또는 하위개념으로 정의 내리거나, 인간의 노동력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조가 탄생한 것은 불과 일 백여 년 전 일이다. 인류문명의 시원을 대략 칠천여 년 전 일로 치면, 일 백여 년이라는 수치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대비지수이다. 대략적으로 육천 구백 여년 가량을 삶의 보편성과 노동력이 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근세시대를 거쳐 근대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이 쇄락했다고는 하지만 전체의 비율로 치자면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 것이 삶의 행태에 대한 전반적 가치판단들이다.
말머리가 무거운 이유는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자각의 우물에 지식인의 역할이 여전히 침잠해 있다는 데에 있다. 선구적인 깨우침을 설파함으로써 인류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선사한 과거 지식인들의 수고를 읽다보니 여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제 논에만 물대며 입신양명의 끄나풀을 놓지 못하는 각박한 현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얻은 지식을 지식智識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현대 지식인들의 알량함에 치기가 들기 때문이다.
본말로 들어가서 인천시는 10개의 구와 군을 이루고 있는 광역 대도시이다. 외형적인 지대함은 서울을 포함해 전국 7대 광역시 가운데서 가장 넒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가운데 요즘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는 지역구는 한창 재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는 동구이다. 인천시 동구는 자치구의 틀을 지녔지만 여러모로 낙후돼 최신이라는 첨단증후로부터 비켜난 지역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첨단증후라고 단적으로 표현한 데에는 첨단증후에 대한 이면성이 삶의 정수리를 위협하는 부분이 일정도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 것과 묵음의 복합적인 문제점들이 외형적 갈등과 함께 적나라하게 산재돼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정도가 심각한 수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 제기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동구지역에 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한 몰이해와 역사인식의 부재에 대한 해법을 찾기에 이르는데, 그 방법으로 ‘인천공부’라는 진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어렵지 않게 도출해낸 해법이지만 정석의 풀이과정과 묘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맨 손으로 지역복지 사업을 수행하는 미쁜 일꾼들이 팔을 거둬 붙였다지만 제 몫이라고 하기엔 하중이 무거웠던 탓이 컸기 때문이다.
지역 주체는 주민이다. 주민이 정체성과 정주성이 부재하다고 해서 매개자인 지역복지 운동의 일꾼들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와중에 ‘인천의 양심과 지성인의 역할’을 선언한 열두 명의 소장학자들이 넥타이를 벗어젖히고 선생 노릇을 자처해 주민 앞에 나서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역사, 경제, 생태환경, 종교와 문학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정점에 이른 엘리트라는 꼬리표를 떼고 ‘이 만큼 성장하게 해준 인천’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 준다는 의지를 모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지대하게 다가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괄목할만한 것은 지역복지와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매진해 오던 동구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구체적인 공부를 통해 지역주민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깊이 접근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주체는 주민이라 했다. 이러한 반향을 슬기롭게 받아들인 주민의 의기투합은 무엇보다도 대미를 장식하는 화룡정점에 다를 바 없는 거였다. 댓구로 늘어놓기엔 적절치 못한 비유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벌였던 지식인들의 민족 계몽운동이 불현듯 대비가 되었다. 불지불식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쓴 <잉게 숄>의 종언이 뇌리에 머무름이 감지되고 있었다. “남을 도와주는 손은 기도하는 입술보다 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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