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그 집 앞

濟 雲 堂 2009. 5. 2. 00:10

 

41813

 

 

1988년 부처님 오신 날

 

얼굴을 붉히며

작은 화분을 건네주고는

어디론가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 그녀

 

왜, 주고 간 것일까 

 

연락처도

그 흔한 꽃말도

적혀 있지 않는

꽃 단지

 

몇 날, 며칠을

염두에 머물게 했던 그녀를

다시 본 것은

이집트 경양식 앞 길

늦은 밤이었다

 

꽃 단지와

붉그스레함으로 기억되는

그녀의 모호했던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이렇게 만날 수도 있구나

이런 걸 운명이라고도 하는 구나

이런 걸,

이렇게...라고

 

무한궤도와 같은 삼 년,

같은 극지가

한 도가니 안에서

펄펄 끓고 있지만

같은 극이었다

지남철처럼 휑댕그렁한 포물선을

남겨 놓은 채로

 

나에게도 아픔이었지만

그녀도 아팠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다른 가슴에도 전이 되었다

 

오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때 그 순간처럼

뇌리를 파고드는

같은 파장의 전류를 느끼게 된다

 

꽃 단지의 향

갑자기 가슴으로 밀어 닥쳐오는

알 수 없는 흥분을

인하대학 병원

영안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영안실을 가득 메운

수 많은 조문객을 헤치며

지나칠 순간이었건만

골수 뒷채를 잡아 당기는

이 명백한 눈

 

서너 살 전후 쯤으로 보이는

계집 아이 둘이

영전 앞을 뛰어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기억의 가지에는

꺾였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영겁의 사슬이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대궁일 수록에

열매도 달게 맺힐 수도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갈 무렵

뜬금없이

그녀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미미라고 불리던 개

소의 고삐가 걸려 있던 솟을 대문

걸걸한 황해도 말씨를 구사하던 그녀의 아버지

거구의 동생

작지만 어여쁘셨던 그녀의 어머니

오빠 하나

그리고 윗 언니

오순도순했던,

그 웃음 소리 간 데 없이

부식되어가는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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