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부처님 오신 날
얼굴을 붉히며
작은 화분을 건네주고는
어디론가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 그녀
왜, 주고 간 것일까
연락처도
그 흔한 꽃말도
적혀 있지 않는
꽃 단지
몇 날, 며칠을
염두에 머물게 했던 그녀를
다시 본 것은
이집트 경양식 앞 길
늦은 밤이었다
꽃 단지와
붉그스레함으로 기억되는
그녀의 모호했던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이렇게 만날 수도 있구나
이런 걸 운명이라고도 하는 구나
이런 걸,
이렇게...라고
무한궤도와 같은 삼 년,
같은 극지가
한 도가니 안에서
펄펄 끓고 있지만
같은 극이었다
지남철처럼 휑댕그렁한 포물선을
남겨 놓은 채로
나에게도 아픔이었지만
그녀도 아팠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다른 가슴에도 전이 되었다
오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때 그 순간처럼
뇌리를 파고드는
같은 파장의 전류를 느끼게 된다
꽃 단지의 향
갑자기 가슴으로 밀어 닥쳐오는
알 수 없는 흥분을
인하대학 병원
영안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영안실을 가득 메운
수 많은 조문객을 헤치며
지나칠 순간이었건만
골수 뒷채를 잡아 당기는
이 명백한 눈길
서너 살 전후 쯤으로 보이는
계집 아이 둘이
영전 앞을 뛰어 다니는 게
눈에 띄었다
기억의 가지에는
꺾였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영겁의 사슬이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대궁일 수록에
열매도 달게 맺힐 수도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갈 무렵
뜬금없이
그녀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미미라고 불리던 개
소의 고삐가 걸려 있던 솟을 대문
걸걸한 황해도 말씨를 구사하던 그녀의 아버지
거구의 동생
작지만 어여쁘셨던 그녀의 어머니
오빠 하나
그리고 윗 언니
오순도순했던,
그 웃음 소리 간 데 없이
부식되어가는
그녀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