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열려 있었다
우리의 삶에 놓여진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 변한다는 것에는 이상과 현실, 모두가 시간의 매카니즘에 따라
변해간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그래서 길은 다시 새 길을 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변화의 가능성과 폐쇄성을 동시에 수반하는 이 이타적 공간조차도
오래된 기억을 결코 밖으로 치우지 못하고
다시 길 위에 놓여지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신포동은 새로 생긴 포구에 딸려 만들어진 지명이다
헌데, 사진을 박은 이 길은 신포동에서 한 길 건너인데
내리 또는 내동이라 불려지는 길이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논산과 강경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에 따른 이질감이 신포동과 내동에서도 엇 비슷하게 느껴지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지역의 역사를 좀 더 들춰보면 굳이 충.전의 접경 지역을 예로 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신포동 일대는 일본인(집)을 중심으로 중국인(집)들이 군데군데
포진해 있었고 요즘 내동이라 부르는 내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서 살아갔던 곳으로 외형적으로도 구분이 확실했던 동네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장풍의 이국적 전경들이 펼쳐진 공간이 신포동이고
또 하나는 1970년 말까지도 기와집에 초가들이 밀집돼 있어서
이러한 대별 현상이 이채로웠던 공간이 다름 아닌 내동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그 경계에서
망개떡 장수를 만났다
해방과 더불어 만들어 먹게 된 망개떡과
일본인들이 인천에 발을 붙이고 살았던 (1882년부터 1945년까지) 시기에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즐겨 만들어 먹었던 당고를 한꺼번에 만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망개떡은 지금, 의령이란 고장의 특산물이 되었지만
포괄적으로 찹쌀이든 멥쌀이든 혹은 섞어서 만들었든 지간에
망개나무 잎사귀를 싸서 만든 일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운 떡이다
현재 망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망개떡을 만들어 먹으면 불법이 된다는 사실도 덧붙일 얘깃거리지만
본말이 아니므로 어쨌든 망개떡과 당고를 신포동과 내동의 경계에서
만나게 됐다는 얘기.
유년의 추억. 특히, 소풍 갔었을 때의 추억을 기억해보면
망개떡 장수와 당고 장수는 소풍의 행렬 맨 뒤에서
목적지까지 뒤따라 오곤 했었는데
우리들은 늘 행렬의 뒤를 오락가락하면서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낼름낼름 받아서 사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현재진행형으로 기술한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이 당시의 소풍은 학생들만의 소풍이 아니라
온 동네의 소풍이었기 때문이다
사촌은 물론이고 이웃들까지 소풍의 대열에 참여해서
김밥과 당시 최고의 음료인 사이다와
감자며 옥수수 등을 싸들고 떠났던 동네 행사였다
찹쌀 또는 찹쌀과 멥쌀을 섞어 물 반죽해서 동글게 만든 것을
팔팔 끓는 물에 넣고 얼마간 기다리면 다 익어 수면 위로 동동 떠오르는 떡
이 것을 찬물에 곧바로 담그면 이내 가라앉게 되는데
이 떡을 채로 건져서 갖가지 고명을 뭍히게 되면 완성되는 것이 바로 경단, 단자 또는 당고가 되는 거였다.
위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팥 앙금을 뭍힌 팥 당고이다
물론 경단, 단자 등으로도 부를 수 있지만 이 글의 성격상 당고 (だンご)
라 부르는 게 적절한 비유일 것 같다.
다른 얘기지만, 소풍에 대한 얼토당토한 전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풍 전 날 밤. 내일은 제발 비가 내리지 말기를 기구하면
여지없이 비가 내리고, 비 내리는 이유에 대한 온갖 억측 가운데 하나가
우리학교 소사가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 또는 이무기를 작살 내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전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학교 친구들도 그런 전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여하튼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만난 망개떡과 당고는
봇물에 갇혀 있었던 추억의 물고기들이었고
고개를 젖히자 그 추억들은 거리로, 유년기의 그물을 통과한
미꾸라지들처럼 길 위로 쏟아져 흘렀다
망개떡은 원래 약간의 새콤스런 사과 향이 묻어나 있어서
방부의 효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주전부리에 궁색해 있었던 어린 시절 최고의 먹을 거리였다
누렇게 변한 갈잎 같은 것을 조심스레 떼어내
하얀 속심으로 들어 있는 거피 팥의 달콤함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속절없이 뱉어내는 탄성은 연실 주억거려도
싫증나지 않는 고개짓이었다
요즘은 비자가 없어도 여행이 가능한 일본
몇 년 전만 해도 일본 갈 비자를 받으러 갈 때마다 읊었던 '아.더.메.치.유'가
절로 떠올랐던 일본 방문 길에서
재래시장 한 켠에서 발견한 당고를 보고 얼마나 회한이 깃들었는지 모른다
물론 가슴도 벌렁거리고 치에 떨던 식민지의 유습에 배인 습성이겠지만
먹을 거리가 별로 신통치 않았던 어린 시절에 딱히 떠올리만한 것이 있다면
역시 당고를 최고로 치지 않았을까
당고와 망개떡을 39년 동안 길 거리에서 팔았다는
그에게서 묘한 빈대 냄새가 났다
이 또한 잊혀질 뻔한 냄새다
낮은 빛으로 흔들리는 전등조차 아까워 한가로운 낮에
겨드랑이며 바지 허리, 까뒤집을 수 있는 옷의 모든 배후에 숨어 사는
빈대를 엄지 손톱과 엄지 손톱 사이에 모다 놓고 으깰 때마다 터져나오는
비릿한 그 냄새가
박상 통에서 펴오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유년과 나이 들어감의 그 모든 경계에서 펴오르는 냄새는
한 통속일 거란 예감이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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