舌 .썰. 說

상상의 대지 탐사전 評-구,전,박 세 분의 노고와 어떤 허방다리

濟 雲 堂 2007. 10. 14. 01:14

 화도진 도서관 또는 화도진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화로'라 불린다. 만석동과 화평동의 첫머리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고 불러줄 만한 이름인 것 같은데 웬지 모를 편리성과 용이성이 적용돼 만들어진 이름 자 라는 게 조금 맘에 걸린다. 편리함을 �는 건 당연한 행정처사임에 분명하지만 용이함에 쉽게 적용되다보면 그 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문화 그리고 삶의 전반적 행태들이 함몰된 채 한꺼반에 도매금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함으로 지명 짓기는 좀 더 신중해야할 구석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 길을 따라서 조금 오르다보니 '운석의 터'라고 당당히 돌에 박아버린, 장면박사의 흔적이라고 휘갈겨 쓴 이 허무맹랑한 현실이 눈에 띈다. '운석의 터'라 이르면 장면박사의 생가인지, 어린 장면박사가 놀았던 공간인지 아니면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 동네 사람들을 놀래켜 지어진 이름인지가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는지조차도 의심의 시선을 가눌 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장면박사는 1899년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한 살부터 송학동 3가 7번지로 적을 옮겼고 타운센드상회에서 일했던 아버지 장기빈의 아들이란 점이다. 장발, 장극을 형제로 둔 맏이라는 사실도 첨부한다면 

산수정 삼정목 칠번지 장기빈 씨 아들 장면(28), 장발(25) 미국 뉴욕대학에서 신학과 미술 전공하고 금의 환향함 동아일보 1925년 8월 21일 기사는 애초부터 부정되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길을 벗어나 길이 내어준 길을 따라서 무작정 발길을 옮긴다. 길은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의미의 길을 열어주지만 길에서 나는 길을 잃을 때도 멈출 때도

길이 나를 막는 게 아니라 도시의 색채가 나를 제어한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만든다. 색체가 주는 의미는 내 존재를 살피게 만드는 향신료와 같다. 어쩌면 지독한 각성제일 수가 있다. 커피나 술처럼 마음이 쪼그라들고 육신이 외롭다고 느껴졌을 때 원색적으로 망막에 꽂히는 이 처연한 간판들을 읽을 때마다. 살천스럽게시리 마음이 뛴다. 술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혹은 얼굴없는 미녀의 가슴이 상상되면서 발길 가누기가 서툴게 된다. 정박해야할 부두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인생의 피로와 길의 단순성에 마음이 잠시나마 지쳤을 때 표박지에서 흔히들 느끼는 이 같은 감정은 아주 즐겁게 마시는 커피 한 잔과 같다는 생각. 

 길에서 돌아와 다시 그 길의 일부를 떠돌 때. 다시 만난 이 할머니의 머무름의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메모의 모든 표기는 아라비아 숫자 네자리 수이고 정확히 판독할 수 없는 난수표처럼 일정한 숫자의 나열이었으며 부지런한 고개의 상하작용의 규칙성과 일정한 기계적 소음에 맞춰 뭔기를 열심히 받아 적고 계시는 모습은 이 도시 어느 곳이든 유심히 살펴보면 이 할머니의 행방은 금새 눈에 띄게 된다.  상상했겠지만 이 할머닌 지나가는 자가용의 번호판 숫자 네자리를 열심히 기록하고 계셨던 것이다.

1988년 할머니의 가족는 단란한 여느 가정과 같았다. 어느 날  뺑소니 사고로 인해 아들을 잃게 된 후부터 가정의 뿌리는 송두리째 앗겼고 가족은 풍비박산나고 말아 그 원인과 치유를 본인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 어느 곳에서나 유심히 살펴보면 찾아낼 수 있는 실제상황이다.

도시는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질적 양적 팽창의 광란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광란에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선 관대하지 않게 처리된다는 불문률이 존재한다.

21세기의 문화 양태는 이제까지의 인간이 갖추고 살아야할 모든 덕목을 주창하지만,  의외로 이러한 기치 아래에는 인간적이라는 도덕적 관념이 상실돼 있거나 사회적 부수물로 인식되어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일종의 바이러스 개념을 갖게 만들고 있다. 인체보다 더 오래된 유전자를 갖고 있는 바이러스의 변화와 진화체들은 거의 소통구조를 지니지 못한 하위개념의 생명체로 여기는 수가 많다는 점이 오늘 날의 폐해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복합구조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복잡성과 내연적인 인간적 의지를 곤란에 빠트린다는 잠시의 교훈을 뒤로 물리고 좀 더 단순해지자는 각오를 갖는다.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인천의 배다리라는 지명이 알려주듯이 단순 우직함이 깃들어 있는 '배다리'를 뇌까릴 때마다 웬지 싱싱한 즐거움이 나를 압도한다. 뱃어귀에서 갓 끌어 올리는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 떼를 바라만 보더라도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노련한 근육의 이완, 수축 과정을 반복하면서 꿈틀거리는 팔뚝과 노냥 멈추지 않고 출렁거리는 바다의 피부는 보는 이와 거두는 이의 마음을 무아로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다. 뭐, 그런 생동감이 '배다리'에 존재한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그 감동과 체념의 중심 길거리에 '개코막걸리'집이 존재한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됐는지는 뛰어난 상상이 필요치 않다. 그냥 주인의 그런 심성이려니...하면 된다. 덧붙일 것은 주인 아저씨의 벌겋게 닳아 오른 코만 연상하면, 궁금의 증세는 단박에 인식의 마스크를 벗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은 배다리 양조장, 정확히 말하면 1920년대 후반에 반들어진 '인천양조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양조장 가는 길에 만난 우리 시대의 모자이크 그 일부를 만나게 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우리는 개별적이면서 따로 독립된 객체로서의 중심을 지나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배워야 한다.

 배다리 인천양조장에서 두번 째로 치르는 '상상의 대지 탐사전'은 보는 순간부터 술밥 또는 잘 곰삭혀 가는 누룩 냄새가 나고 있었다. 첫번 째인 배다리 역사 사진전에 비하면 첫대면부터 울렁거리기 시작하게 만드는 우울함이 관객을 압도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영민 교수(인하대 건축학부)의 도시 및 건물의 상징적 작품인 압착 혹은 짓누름이란 의미가 담긴 이 작품을 보면서 그러한 감정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도시 건물의 양쪽 모서리를 어느 힘센 거인이 단번에 눌러버린 듯한 이 작품을 보면서 그러한 압박의 배후와 내면의 갈등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인천 개항장 구도심의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자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놀란 장면들이 어슴 떠오른다. 거침없이 토해내는 말 속에는 잘 빚어진 도자기였을 지도 모를 사금파리 같은 옥 빛의 논리들과 매우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졌구나 하는 감흥을 일찍이 받았던 구 교수였다. 매 순간마다 눈을 꿈쩍이며 우보의 행보로 달려왔던 우직스러움이 여전한 구 교수와 그 작품을 바라보며 건물도 하나의 권력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권력이 일방적인 폭력구조를 통한 시행이란 사습을 떠나 쌍방의 협의와 소통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들이 떠 안고 있는 개발의 부작용들이 해소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층 전시실에 따로 마련된 이 건축물, 정확히 말하면 페이퍼 건축이라고 전진삼 교수가(광운대) 해설한 바에 따르면 이 구조물 속에는 현실적 공간을 조롱하듯이 만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천의 도시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댄 일련의 상상의 그림들이 스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전진삼 교수의 장황 설명이 시작됐다. 건축 평론가는 저렇게 시적인가를 새삼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사실 전 교수는 이미 시집 몇 권을 수 년 전에 내놓은 시인이었으되 현직 건축 평론가 겸 출판인이라는 직함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매우 인간적 고뇌를 즐겨 찾는 이미지를 전해주었던 시집과는 달리 '상상의 대지 탐사전'에서는 고뇌를 물리고 새로운 세상의 건축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철저한 이론가였다.

전 교수는 동안을 가졌다. 늙지도 않나 보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제 나이를 측정하겠는가 말이다. 한 때 꽃미남~!꽃미남!이라고 부르던 지난 날, 소위 '민증'을 까 놓고 보니 필자의 선배가 아니었는가 말이지. 어쨌든 전 교수의 설명은 부드럽지만 도시적 고뇌를 풀어내는 음유시인 또는 예언자적 견해들로 일갈했다.

 박준호 교수(단국대)는 시종 들리지 않는 말투로 청중을 곤란케 했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 두려움, 공포, 다음 세상은? 이라는 전반적 문제점들을 대화 방식으로 풀어 독단의 사슬을 끊으려 했다. 괴팍하기도 하고 기인이기도 한 구영민 교수의 관망에는 이미 이들 셋이서 오래된 훈련을 쌓아온 것 같은 이미지가 물씬거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랬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 전시하려고 했었는데 여의치 않았고 드디어 도시개발의 번제물이 되어 스러져가는 배다리에서 열게 되었음을 운명처럼 고마워 하고 있었다. 내 차례였다. 전진삼 교수의 소개에 따라 감평해 줄 것을 요구받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나는 이번 건축전에 그 관계성으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부합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도 많은 부적격자였다. 하지만 느낀대로, 보고 난 후 이 들이 초대한 상상의 대지에 대한 소시민적 감성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기회로 생각해 내 '꼴 값'을 하기로 했다.  

 "이 번 상상의 대지 탐사전을 보고 받은 첫 느낌은..."이라고 말을 떼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전진삼 교수님과 작품을 낸 구영민 교수님. 그리고 박준호 소장님은 마치 88올림픽 때 서양 노랫가락을 함께 불렀던 '빅 쓰리' 같다. 운을 떼니, "그러면 우리 셋 중에서 누가 파바로티냐?"며 전 교수가 말을 받는다. 좌중의 웃음을 뛰어넘어, 대뜸 세 분... 구, 전, 박은 미친놈이거나 천재거나 인간적 고뇌를 시로써 승화시킨 인천의 시인(=건축가?)이라고 말을 세웠다. 그리고 주절주절...사회적 소통과 인간적 관계, 권력구조의 폐해, 도시개발의 잔혹성, 더딤의 미학, 건축물의 인간화 등등 '빅 쓰리'가 토로했던 내용들 그대로를 요약 정리하듯 짧게 말을 그었다.  무려 두어 시간의 간담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모인 사람들이 파할 줄 모른다. 누군가의 제안이 들어온다. "개코 막걸리로 갑시다"... 우르르 따라 나온다. 개코집은 좁았다. 걸러져야 할 텐데...라는 눈치가 벼락처럼 쏟아져 흐른다. 모인 사람들 모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제일 먼저 돌을 든 사람이 빠져나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 선다. 배다리 철교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박준호 교수의 작품이 뇌리에 아직도 꽂혀 떼어지질 않는다. '유토피아는 어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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