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9월 3일 자

濟 雲 堂 2007. 9. 3. 17:51
 

 -인천의 틈을 논하다.


밤이 깊어서야 쪽방 같은 작업실을 빠져나온다. 무슨 일할 게 그리 많으냐고, 얼굴 좀 보며 살자고, 사람으로 태어나 옆 사람과 웃음 한번 건네지 못한 채 잠들어야 하느냐는 등 볼멘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거란 예감을 하면서 집에 들어선다. 다행히 불은 모두 꺼져 있다. 모두 잠들어 있었다. 30년 묵은 인천 최고의 아파트 거실 창으로 내다보이는 내항도, 암흑으로 물든 바닷물을 품고 잠들어 있었다. 내년이면 별들이 내려준 이슬을 쌓아온 지 어언 90년이 되어가는 내항을 바라보다가, 문득 비상한 손놀림으로 주물러 놓은 덩지 큰 괴물 속에서 뭔가가 스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착각에 빠진다.

 1897년부터 2년가량 수형생활을 하다가 사형을 모면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청년‘김창수’였을까? 아니면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계획 실패에 따른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도크에서 잔혹한 노동을 치룬 1914년 불혹을 앞둔‘김창수’아니, 백범이었을까? 그러나 어둠 속 정체는, 온데는 명확한데 현존하지는 않았다. 불현듯, 인천의 정체는 있는데 정체성이 없다는 사념에 휩싸인다. 있었던 사실조차 불식시켜버리는 무념의 항구를 채우는 것은 중국을 오가는 배들과 먼지 펄펄 날리는 잡동사니들뿐이었으므로 아시아 최초의 수문식 도크는 살아있어도 죽은 바다를 품은 모습이었다. 하긴 정체성이 없는 것도 정체성이었다. 백범 김구를 기념해 장수동 공원 후미진 기슭에 동상을 세운 일은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일이나, 공간적 시점을 곱씹어보니 별리고개라 부르던 탈출 경로에 불과했으므로 지세의 덕을 보기엔 틀린 처사였음이 내심 부아가 돋는다. 네 살 때 걸린 염병도 기억해내 얼굴이 곰보팽이가 됐음도 전해지는 판에 겨우 서울로 탈출하려했던 경로 인근에 세운 동상은 처량하다 못해 서글퍼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릇 백범이 “인천은 나를 살리고 나를 만들어준 제 2의 고향이다”라고 하지 않았던들 이다지 사념에 휩싸이지 않았을 것을.

 역사적 사건들은 문화의 원형질이 된다. 문화의 원형질에 충실하지 않은 현재적 접근은 무념 무감한 시민사회를 배태할 따름이고 나아가 결속을 와해시키는 원인자 노릇을 한다는 걸 익히 터득하지 않았던가. 금세기 패러다임에 문화라는 꼬리말이 붙지 않고서는 총체적으로 엮어진 삶의 화두에 진입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절감하는 오늘의 현실이 그렇다는 말인즉. 이러한 단초의 배경에는 인천역사를 따라잡지 못하면 위험한 철부지가 되거나 자가당착에 빠진 위정자가 된다는 사실을 하루속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한연후지송백(歲寒然後知松栢)이라 했다.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송백의 진가를 안다는 말이다. 범 세계가 역사를 바탕으로 창출해내는 문화 관련 컨텐츠를 이용해 잘 살아보겠다고, 두 눈에 쌍 심지 켜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겠다고 난리법석들이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던 방이라 해서 한번 들어가는데 5달러를 받는 쿠바를 예시로 삼고 싶지는 않다. 이런 와중에 늦은 밤 처연하게 다가오는 내항, 무언의 일렁임은 담배에 쪄든 옷소매를 쿡쿡 부여잡는 듯했다. 모 24시 사우나로 바뀌어 백범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옛 감옥소(감리서) 한 구석에 냉랭하게 묻혀있는 검은 표석, 터진개 갯고랑 길을 따라 쇠고랑 차고 굽힌 가슴에는 독립의 열정을 숨긴 채 노역에 시달리던 백범의 어깨가 하얗게 오버랩 되고 있다. 하루 만에 날씨가 이렇게 요변 떨 수 있냐면서 긴소매를 걸치던 시장 상인들의 넋두리가 깊은 어둠에 빠진 인천의 하늘 처처로 별 알갱이처럼 스며든다. 아, 내항 속으로, 바다 속으로 뭔가 뜨거운 게 자꾸만 입수동작을 연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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