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다 마주치다 맞대다 등의 단어들에 내포돼 있는 공통분모는 가까움이다. 상황 전개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지만, 대부분 동질적 요소들에 양자가 공감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만남은 서로에게 굳건한 결속의 시금석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따라(13/2) 유난히 만남이란 명사가 특별나게 여겨지는 이유는, 천년 가까이 등진 채 하나의 신을 모셨던 로마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가 만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의 포옹과 연거푸 세 번의 키스가 주는 의미는 양대 종파를 대표하는 수장의 만남을 넘어, 냉소적이고 적대적이었던 관계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던 것이다.
종교적 신념의 극단적 표현이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현시점에서 31%를 차지하고 있는 범 기독교의 화해 제스처는, 69%의 다른 종교 군에 모범 답안을 보여주는 방증 사례가 된다. 이번 사건은 종교를 뛰어넘어 유일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처지로서는 일말의 반면교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북측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따른 남측의 개성공단 폐쇄 국면은 평가의 온도차는 있겠지만, 악순환의 근본 고리를 끊지 못하는 양측 대표들의 무능과 무력함이 증명되고 있다. 실명의 화해 키스는 부러움과 선망의 대체희열이 되고, 익명의 악수와 포옹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몰가치적 판단이 아쉽기만 하다.
극적인 만남은 천년 동안의 침묵과 기다림, 성물교환과 지구촌 한 형제 확인 등 지극히 일반적인 대면절차로 흘렀지만,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며 형제정치의 마지막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라울 카스트로가 다리를 놓았다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체 게바라에 이어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로 이어지는 게릴라 혁명의 전위대가 주선했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다.
DJ정부에 이어 노무현정부가 연출했던 드라마틱한 북측과의 만남은 역사로만 남을 뿐, 결코 교훈이 되지 못했음이 반추된다. 어쨌든 헤게모니 싸움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권력의 그늘에서 평화를 노래하고 그 꿈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대다수의 익명들이기 때문이다. 만나야 화해할 수 있고 마주서서 어깨 힘을 빼고 껴안아야 절대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두 영적 지도자의 극도의 평범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깨달음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이즈음, 익명의 누군가를 껴안고 싶다고 하면 과연 주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