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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대의 우울한 독백

濟 雲 堂 2015. 7. 15. 18:38

  늙수그레한 아파트 널따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예닐곱 입주민은 각자의 호수 층 번호를 누른 뒤, 한두 걸음 씩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에 눈길을 내리 꽂았다. 층별 도착 벨 소리에 따라 사람의 숨소리는 줄었지만, 넓어진 공간만큼의 침묵이 새로 채워졌다. 14층 꼭대기를 누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정원 17명 1,120kg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능력과 1층부터 14층까지 거친 숨을 덜어줄 28초 동안, 공여공간 안에서 ‘사람의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십년 가까이 수인사를 해 오던 어른들도 몇 남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먼저 다가와 밀랍 처리된 악수조차 선 듯 청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본격 대중화된 스마트 폰이 우리에게 제공한 사회풍경의 일부이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던 한 줌 기계 덩어리가 우리 사회를 ‘하나의 풍경’으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비약이라면 비약의 시간이었다. 버스와 전철을 타도, 식사를 하는 중에도 하물며, 수업 중에도 스마트 폰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2015>에 역자 후기를 남긴 소설가 안정효의 말이 섬뜩 가슴에 꽂혔다. “국민이 정치와 축구와 휴대전화의 손바닥 세상 말고는 다른 어떤 언어도 모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감시와 통제를 명제삼아 1949년 출간한 미래 소설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32>는, 시대는 앞섰지만 욕망과 자유의지가 넘치는 현대 산업사회에 경종으로서 여전히 그 가치는 존중받을 만 했다. 소설 속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는 소마(Soma)의 남용을,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등치시켜보면 이음동어의 논리 안에 고스란히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호모 텔레포니쿠스’에 견주어 ‘호모 모빌리언’이란 신조어를 만든 카이스트 이민화 교수는 “스마트한 세상에 스마트폰 하나면 슈퍼지식을 손에 쥐는 거고, 너르고 다른 세상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내는 ‘호모 모빌리언’이 등장함에 따라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했다. 미래는 늘 새롭게 열려야 하는 운명적 존재임에 맞다. 그러나 빌딩(사회)이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그 그늘과 바람은 더욱 짙고 세차게 분다는(까뮈의 사회적 부조리) 걸 간과했던 것일까. 해서, 투명한 소통과 공유를 열나게 주장하는 이면에 우리사회의 고독과 단절의 골은 더욱 깊게 패여 있었던 것일까.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26년 만에 수정 집필한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에서 “내가 그린 세계는 너무 빨리 왔다”고 뜨악하게 해설하고 있다. 지난 7월 9일. 러시아 발 외신에 의하면, 스마트폰 ‘셀카’를 이용해 100여명이 사고당하고 10여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으므로 국가적조치가 필요하다는 소식도 전해 듣는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정신의학회’도 하루 여섯 번 이상의 ‘셀카’ 행위와 스마트폰 부재에 따른 이상 현상을 ‘중독’에 준하는 ‘정신질환’으로 발표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된다. 소마(Soma)와 스마트폰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의 ‘대상 의지 중독’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적 존재로서 타자와의 교감과 그 해법이 절실했던 만큼 난세가 되었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20여 년 째 같은 번호를 사용하고 몇 차례 기기를 바꾸긴 했지만, 전화를 걸고 받는 데에 별 다른 문제가 없는 요즘, 내외를 막론하고 질적 양적 공격을 서슴지 않고 있다. 멀티 메시지와 대용량 사진의 송수신은 불가능하고, 남들이 흔히 하는 ‘밴드’ ‘페북’ ‘앱’ 등은 물론, 공짜 통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모종의 불안감을 밑불삼아, 여기저기서 귓구멍에 대고 불 지피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 다 쓰는 스마트폰인데 혼자 폴더 폰을 고수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넘쳐나지만, 현재 쓰고 있는 핸드폰 기능도 다 알지 못할뿐더러,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걸 시류에 따라 번번이 갈아타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오죽하면 배터리를 두 개 더 준비하질 않았던가. 족히 20년은 더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파손될 걱정은 이미 접은 지 오래다. 진작부터 핸드폰에 줄을 매달아 옷에 꿰고 다녔기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파손 정도가 심하지 않았던 경험도 있다. 세계적 품질을 보장하는 S회사 제품이 아니던가. 이정도면, 고독과 소외를 유발케 하는 스마트폰과 무정한 현실에 대응력을 갖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밀려드는 고립감과 충만한 자유의지는 여전히 한 뇌수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너무 빨리 와버렸던 것일까. 물신주의 보자기에 감싸진 인간의 영혼이 너무 물렁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주절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