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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 仁川閑談

濟 雲 堂 2014. 7. 1. 20:13

說, 仁川閑談설 인천한담

 

인천일보 문화면에 필자의 글이 실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였다. 인천에서 발간된 책을 일반 서점에도 비치, 판매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30센티미터 書架서가 운동의 의의’를 쓴 것이 그 처음이었다. 특히, 역사와 문화 관련 책의 비치 및 판매는 당시, 인천 사회의 정체성 논란과 맞물렸던 만큼 의미가 있었고 서점가에 애향심을 꽂아두자는 작은 바람을 담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이후, 「문화산책」 란에 40여 일에 한번 꼴로 실리게 됐고 열 번의 별자리 이동과 열 번의 이슬을 연거푸 맞아 ‘星霜十年성상십년’이라는 역사를 엮어내기도 하였다.

 

글쓰기는 일종의 강력한 카페인이고 맹렬한 자아도취적 문화 산물이다. 내용과 무관하게 이름이 드러나고 얼굴이 알려지면서 뒷덜미를 뻣뻣하게 만들곤 하지만, 이내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같은 자기반성의 유전성을 저버리지 않는 성실함이 내재돼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부족한 자아를 채워 책임감 있는 삶을 꾸려가는 데에 더 없는 길잡이라는 말과 상통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글은 칼보다 더 위력이 있고 寸鐵殺人촌철살인할 만큼 두려운 존재임이 드러난 만큼 ‘사회적 약자’에겐 희망의 등불이고, ‘권력을 남용하는 자’에겐 자성의 회초리 노릇을 해 왔던 것이다.

 

인천의 유수 신문을 마다하고 한 신문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돌아간 김홍전 논설실장과의 인연이 컸다. 대쪽 같은 성품, 후배를 아끼는 넉넉한 마음, 인천의 속사정을 차근차근 헤아리는 논리 등에 매료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 지면을 고수해보자는 게 당시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부족한 내용 혹은 한 글자의 오자 탈자가 있더라도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일일이 묻고 재차 확인하는 세심함이 오히려 필력을 더욱 단련시키는 계기되어 십년 동안 연재를 할 수 있었음도 연모의 중심추로 남는다.

 

두 번째는 필자의 고교 시절에 국어를 가르쳤고 시의 심상을 끄집어내었던 조우성 주필을 들 수 있다. 문단에 상재를 하고 인천 역사의 초상을 겨우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주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오리무중이었던 인천의 길을 안내한 결과로 여겨진다. 아랫사람으로서 모범을 배워 닦고 깨우치는 일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설정돼 있다는 것은, 글 쓰는 자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한 상황의 현재 진행형은 삶의 맥을 짚어 보기에 더 없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여하간 두 선배의 음덕으로 지난 십 년간 칼럼을 지속케 하였음에 지면을 빌어 인사를 올린다.

 

며칠 전, 김진국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기자 신분을 넘어 드세 보이는 학위를 가졌지만 참 물렁하고 순한 성품을 가진 후배로서 지방지의 새로운 전통을 쌓으려는 터줏가리이다. 필자의 이름을 내건 고정칼럼을 써 달라는 부탁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냉큼 답하고 말았다. 입방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왕이면 ‘仁川閑談인천한담’으로 해주십사는 부탁을 덤으로 올렸다.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내심 쾌재는 잠시였을 뿐, 무한 책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무게감에 발목을 뺄 수 없었다. 가뜩이나 가업도 버겁고 쟁여둔 원고 묶음도 먼지 털어 빛을 보게도 해야 하는 시점에서 격주 원고 마감은 ‘토끼 잡으려다 팔부능선에서 내려 가야할 길을 찾는 처지’를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름을 내건 칼럼이 게재되는 배경은 이랬더랬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것에 굳이 사족을 단 이유는, 십 년 개근에 대한 자축이요 한데 눈을 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판 개인적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었다. ‘인천한담’은 말 그대로 편하게 인천을 관망하듯 그려나가지만 무릎으로 기어서 체험하지 않은 인천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는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