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출몰하는 이상 기후의 표징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1904년 정식으로 기상업무를 보기 시작한
인천의 경우
역대 여타 도시에 비해 강수량 내지는
안개 출몰 빈도수 그리고 태풍의 행보 등을
비춰 봤을 때
천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도시로
기록돼 있다
인천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건조한 도시로 정평이 났다
仁川
역사적 변천 과정은 이와 다르게
훨씬 요상한 형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미추홀=>매소홀=>소성현=>경원=>인주=>인천=>제물포(제물량,제물진)=>인천
이 가운데 인주에서 인천으로 넘어가는 대목에 주목해야 하는데
仁州 - 水 = 仁川라는 점이다
어진 고을이었다가 이자겸의 역성혁명 불발로 인해
불경스런 곳이라 해서 주(州)에서 한 단계 격하돼
물 수 변이 빠져 천(川)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물과 관계가 적은 지리적 조건임에도
뎅그마니 천(川)을 갖게된 것이다
자연 조건(물)이 짜서
동생인 온조에게 백성을 맡길 정도로
불망의 선택을 하게된 비류의 애닳음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공간에 전국적 유행을 낳게 된 것이
인천의 목간탕이다(해조탕)
일찍부터 목간탕 문화를 등에 업고
인천에 목욕업을 개시한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전국적 효시로 일컬어지는 공동 목욕당이 바로 그 것이다
목간탕이든 목욕탕이든
그 게 중요할까 마는
어릴 적 추억 몇 대목을 추스려 보면
1분 이상을 앉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답답했던 공간
발끝마저 담가보지 못할 만큼 뜨거운 탕
머리에 비누질을 하다가 가끔 씩
단수가 되거나
뜨거운 물 찬 물이 제대로 섞이질 않아
몸이 데이는 것 등은 다반사였었다
제일 골머리를 썩였던 것은
발가벗고 목욕하는 중에
같은 반 계집애를 만난 일이었다
집 안에 남자만 일곱이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목욕비 절감과 막내에 대한 알 수 없는 배려 탓에
함께 자주 가곤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뒷자리 계집애를 만난 것이었다
목욕탕이라도 컸으면 모를까
게딱지 만한 공간에 왜 그리도 마주치는지...
중학교 들어가기 전
고추 주변에 스멀스멀 펴오르듯
검고 굵은 모근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탕 속에 자그마치 30분 넘게 앉아 있었던 적도 있다
물리적으로 민감했던 당시
찰랑찰랑 물결치는 탕 물
꽃 피고 새 우는 봄 나들녘 부는 바람에
처녀 가슴 몸살 앓는다는 말 그대로
번데기 같던 고추를 은밀하게 자극하던
찰랑찰랑 흔들거리는 물결에 아랫도리가 갑자기
불끈해져 오는 게 아닌가
가릴 수도 만질 수도 없을 상황에
몰래 훔쳐보았던 선데이 서울 표지 장정을 장식했던
모 언니들의 얼굴들은 왜 그리도 떠오르는지
뜨거운 물에 너무 담가 놔서인지
허리께로 붉게 데인 자국이
무서리로 따가왔었던
깨끗이 닦아내고
벌거벗은 채 잠이 드는 것 만큼 평온한 게 없다는
지론이 현재 목간 사후의 행보이다
걸칠 것 없으니 편하고 자유롭다
빤쓰에 끼워 넣은 고무줄조차도 불편해
아예 다 벗어 던지고 잠이 들어 버린다
이 십 여년을 그래왔으니
이 십 여년 동안 이 모습을 보고 자란
곁 가지들도 의례 그러는가 보다 한다
다만 곁 가지들의 친구 방문이 문제다
특히
인천에서 태어나 살면서
한담을 늘어 놓고보니
별 말을 다 널어 놓았다
한가롭게 주억거리며 떠벌리느니,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