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문프로젝트 팀에게
희망과 경계(警戒) 사이에서
정해 년 초. 어느 추운 날, 찬 바람을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너부죽 머리를 디밀고 들어오는 그들의 어깨에는
600년 만에 찾아온다는 복 돼지 기운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상대 예보와는 달리 한기를 잔뜩 머금은 모습이었다.
본디 내 과(科)?^^에 가까운 사람들과 이바구를 푼다는 게 우습기도 했고
첫인상이 곱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보니
밉깔스럽지만은 않다는 인상으로 접수하게 되고 오히려 선의로 무장한
그들의 말솜씨에 언구럭 넘어가는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던 게
홍예문 프로젝트 팀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내 과(科)?에 가까운 무리들과 거리감을 두는 이유는 여타의 교류 과정에서
얻어낸 편린 같은 똥고집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나의 뇌수에는 진단과 전망 그리고 지역 내에 실천적 삶의 구조라는 틀거리에서 봤을 때에 여전히 입만 살아 움직이는 먹물 계층이라는 사고의 편식을 떨칠 수 없었다. 아마도 지난날에 자행됐던 식자층들의 행태를 똑똑히 목도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 이유가 된다. 하마, 정권이 바뀔 적마다 인문학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인문학 사냥꾼(전문가)들이 토해내는 얼토당토한 웅변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삶이 폐허가 되는 것을 수차례나 경험했기 때문에 홍예문 프로젝트 팀을 감히(?) 싸잡아 매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덩어리의 조직이든 개인이든 간에, 한 근도 안 되는 혓바닥으로 반성하는 것보다, 온 몸으로 반성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묵묵히 대항해 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랑스러운 것은, 내 가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양심이란 살덩이가 그 본능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정해 년 초부터 맞닥트린 홍예문 프로젝트 팀과의 조우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구애자의 심정처럼 설렘과 희망 더불어 준비해야할 절망의 외나무다리가 총체적으로 연상되는 드라마의 한 장면임에 틀림없는 사실이 돼버렸다. 하여튼 나의 한 쪽 코뚜레가 홍예문 프로젝트 팀에 꿰어진 상태이기에 운명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만국공원은 백 수년을 역사의 길거리에 방치된 이력을 갖고 있음이다. 소위 공원(퍼블릭 가든)이라 이르는 이 영험하고 우아한 근대의 짐승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미 있는 사실이지만, 먹고 살기 바빴고 개발 독재와 정치적 외곬들이 지배했던 과거의 전행을 통해 살피면 너무도 외롭게 자라난 사생아 같은 세월을 보낸 이력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보시라. 천진한 대지에 돌, 쇠말뚝 박아가며 식민 지배풍의 건축물들을 세우고 땅따먹기 식으로 조계지를 그어대 한국 사람은 한 발자국의 발도 디디지 못하게 했던 치외법권적 조차지 그 금단의 땅 만국공원. 그 머나먼 지평의 공간을.
만국공원이 내 안으로 들어 왔을 때, 야윈 몸으로, 황폐해진 영혼으로 비틀거리며 내 속에 들어 왔을 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절감하며 보낸 나의 스무 살 시절은 속앓이를 하며 보낸 자탄의 세월이었다.
이랬던 틈바구니를 겁(?)도 없이 덤벼들겠다는 모 조직(?)이 냉큼 다가왔을 때 느끼는 감정이란 실로 흥분과 절의가 동시에 교차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번번이 이에 도전하겠다고 덤벼들던 친구들이 몇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성~적표는 문전에 방사해 버린 겁탈꾼 수준이었고 차라리 딸딸이가 날 뻔 했던 적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내적(정신적)이든 외적이든 그려지는 그림은 ‘그리움’이란 것을 어머니로 삼고 있다. 그리움의 정적 태반이(탯줄) 그림이 된다면 동적인 표현 양식은 여타의 활동사진 정도로 봐 줘도 될 성 싶다. 결론은 사람의 본질적 그리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방식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거리로 뛰쳐나온 미술은 기존의 그림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한 ‘진정한 생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롱문화에서, 실내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햇볕이 직사되지 않는 자궁 속 꿈틀거림에서, 보호막을 냅다 던져버리고 길거리로 나온 미술의 탄생은 제2의 르네상스가 아니겠냐고 감히 말하련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관점이지만 홍예문 프로젝트 팀이 쏟아내는 만국공원에 대한 그림 작업은 숭고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홍예문 프로젝트 팀에게는 온몸을 쥐어 짜내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희망함이 크면 절망의 늪도 깊다 했던가? 어디까지나 주관적 성찰의 비약이 독이 되지 않기를 묵상하고 싶은 뿐이다.
어느 짜장면 집에 들어서니 ‘처음처럼’을 새겨 넣은 걸개목판이 눈에 띈다. 내가 알기로는 십여 년이 넘은 중국집인데 장사가 안 된다는 소릴 밥 먹듯이 해대는 것이 영 안쓰럽기 짝이 없어 보인다. ‘처음처럼’은 늘 구닥다리가 되어 달아나버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현재를 향해 항상 새롭게 달려오는 이 순간일까? 나, 그리고 사랑하고 싶은 당신들의 지금 이 순간은 도대체 뭐?
“만국공원에 산수유 꽃이 활짝 피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그녀가 말한다.
‘이미 마음속에 골백번쯤 품고 있었노라...’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