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바람의 힘
濟 雲 堂
2001. 5. 8. 19:35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다. 유한하다는 게 때로는 나를 절망적이게 한다.
절망을 느끼는 나의 오감은 수시로 나를 게으르게 만들어 버리지만
나태의 절벽 아래에서 늘 솟구쳐 기어이,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야 마는 한 그루 소나무 그 役事를 보기만 하여도
나의 삶의 에너지는 다시 뜨겁게 달궈지는 기름처럼 뭔가,
만들어 먹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한다.
외로움은,
나의 恥部임과 동시에 무기가 되어 버리는 아주 단단한 호리병이다.
몸이 무거워졌다 싶으면 마셔 버리고 싶고,
비어 있다 싶으면 무엇인가 나를 채울 수 있는 뜨거운 것이 담고 싶어진다.
유와 무가 동시적이면서 제한적인 이 상황하에서 나는 振子의 맥박처럼
유한한 생명을 탓하지만, 무한 아니 영원으로 향하게 만드는
포도주의 신화는 腐心의 기대를 늘상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의 삶을 통하여 내가 일궈 낼 수 있는 품목들을 진열장에 넣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 자신이 여전히 볼품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떡을 만들거나 시를 쓰거나 무료한 회의를 한다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게다가 지역 문화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내가 사는 동네가 소외 됐으니
그 열등감으로부터 일탈하자! 라고 구호만 거창한 가운데,
정작 나 자신을 조각조각 내어 살펴보면 똥만 뱃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늘 불만이라면 불만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진열장은 적어도 그랬드랬다.
혈기가 왕성했던 스무 살 때.
세상을 통 째로 집어먹어도 성에 차지 않았던 때에
제일 두렵게 들렸던 말은 나 자신에 관한 일체의 의문 부호들이었다.
그 때에 나를 일깨워 주었던, 지금 생각하면
내게 말해 준 그 사람 역시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아직도 그 말은 뇌리 속에 잊혀져 가는 死語가 되지 않고
끊임없이 부활하여 틈만 나면, 내게 뭐라고 한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간혹 군홧발로 머리통을 짓누르긴 했지만, 아프지 않았던 것은,
나에게, 아직은 나라는 절대적 존재성이
그 아픔을 잘 참아 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의 시발이 되었다.
"씹 새끼! 좃 같은 새끼가 좃도 모르면서 좃 같이 까불어!"
씹의 새끼는 필히 나를 보고 그랬을 것이고,
게다가 그 씹 이라는 것은 나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던가?
그런데 좃은 또 뭔가?
좃은 조상으로부터 씨내림을 받아 만들어진 나를 지칭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겠는데... 좃도 모르다니..., 좃 같이 까불다니..., 는
무엇인가에로 나를 밀어 넣는(규정하는) 구실을 하게 만드는
억지말이 아니었던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열 번을 더 생각해 보아도(물론 지금까지도 생각해 보는 거지만)
알 수 없는 말임에는 분명했다.
고려 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면서 왕씨(王氏)를 폐하고
이씨의 자손이(李氏= 十+ 八+ 子) 왕위를 취해야 한다고 거론할 적부터
십 팔(씹 팔)이라고 격음 처리된 거라 회자되고 난 후에 라야
이 놈의 욕지거리가 역성혁명을 뜻하는
반동적인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치더라도,
내 입에서 습관처럼 나오는 이 혁명의 사생아는(언어)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육화된 나의 언어로 존재함이
이제는 회의가 든다.
이미 나라는 존재는 바람이거나,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곁에 있는 익명의 '너'도 아침의 여명처럼 외로움이거나
바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그렇게 우리는 벼랑 끝에서 질순한 소나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운명처럼 깨닫게 되겠지만 "바람으로나 살고 싶다"는 말에
이미 우리는 '바람처럼 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만 하다.
우리는 진원지를 모르는 바람의 출처에 대해서
혹은 바람이 게워 내는 영혼의 노랫소리에 대해서
귀가 너무 얇아진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점점 불어나는 삶의 무게는
우리가 사는 대지를 너무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진부해진 사상들은 희망을 뿜어 대는 만파식적의 그리움으로
가슴을 감싸쥐며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무 것도 없다. 텅 비어 있음이다.
우리의 유한적인 삶에 허허로움을 더욱 채워 나가야 할 때인 것만큼은
분명한 시기이다. 天空의 떨림을 뚫어져라 살펴보자.
거기 바람의 힘이 존재한다. 알 수 없는...
절망을 느끼는 나의 오감은 수시로 나를 게으르게 만들어 버리지만
나태의 절벽 아래에서 늘 솟구쳐 기어이,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야 마는 한 그루 소나무 그 役事를 보기만 하여도
나의 삶의 에너지는 다시 뜨겁게 달궈지는 기름처럼 뭔가,
만들어 먹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한다.
외로움은,
나의 恥部임과 동시에 무기가 되어 버리는 아주 단단한 호리병이다.
몸이 무거워졌다 싶으면 마셔 버리고 싶고,
비어 있다 싶으면 무엇인가 나를 채울 수 있는 뜨거운 것이 담고 싶어진다.
유와 무가 동시적이면서 제한적인 이 상황하에서 나는 振子의 맥박처럼
유한한 생명을 탓하지만, 무한 아니 영원으로 향하게 만드는
포도주의 신화는 腐心의 기대를 늘상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의 삶을 통하여 내가 일궈 낼 수 있는 품목들을 진열장에 넣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 자신이 여전히 볼품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떡을 만들거나 시를 쓰거나 무료한 회의를 한다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게다가 지역 문화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내가 사는 동네가 소외 됐으니
그 열등감으로부터 일탈하자! 라고 구호만 거창한 가운데,
정작 나 자신을 조각조각 내어 살펴보면 똥만 뱃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늘 불만이라면 불만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진열장은 적어도 그랬드랬다.
혈기가 왕성했던 스무 살 때.
세상을 통 째로 집어먹어도 성에 차지 않았던 때에
제일 두렵게 들렸던 말은 나 자신에 관한 일체의 의문 부호들이었다.
그 때에 나를 일깨워 주었던, 지금 생각하면
내게 말해 준 그 사람 역시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아직도 그 말은 뇌리 속에 잊혀져 가는 死語가 되지 않고
끊임없이 부활하여 틈만 나면, 내게 뭐라고 한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간혹 군홧발로 머리통을 짓누르긴 했지만, 아프지 않았던 것은,
나에게, 아직은 나라는 절대적 존재성이
그 아픔을 잘 참아 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의 시발이 되었다.
"씹 새끼! 좃 같은 새끼가 좃도 모르면서 좃 같이 까불어!"
씹의 새끼는 필히 나를 보고 그랬을 것이고,
게다가 그 씹 이라는 것은 나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던가?
그런데 좃은 또 뭔가?
좃은 조상으로부터 씨내림을 받아 만들어진 나를 지칭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겠는데... 좃도 모르다니..., 좃 같이 까불다니..., 는
무엇인가에로 나를 밀어 넣는(규정하는) 구실을 하게 만드는
억지말이 아니었던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열 번을 더 생각해 보아도(물론 지금까지도 생각해 보는 거지만)
알 수 없는 말임에는 분명했다.
고려 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면서 왕씨(王氏)를 폐하고
이씨의 자손이(李氏= 十+ 八+ 子) 왕위를 취해야 한다고 거론할 적부터
십 팔(씹 팔)이라고 격음 처리된 거라 회자되고 난 후에 라야
이 놈의 욕지거리가 역성혁명을 뜻하는
반동적인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치더라도,
내 입에서 습관처럼 나오는 이 혁명의 사생아는(언어)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육화된 나의 언어로 존재함이
이제는 회의가 든다.
이미 나라는 존재는 바람이거나,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곁에 있는 익명의 '너'도 아침의 여명처럼 외로움이거나
바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그렇게 우리는 벼랑 끝에서 질순한 소나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운명처럼 깨닫게 되겠지만 "바람으로나 살고 싶다"는 말에
이미 우리는 '바람처럼 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만 하다.
우리는 진원지를 모르는 바람의 출처에 대해서
혹은 바람이 게워 내는 영혼의 노랫소리에 대해서
귀가 너무 얇아진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점점 불어나는 삶의 무게는
우리가 사는 대지를 너무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진부해진 사상들은 희망을 뿜어 대는 만파식적의 그리움으로
가슴을 감싸쥐며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무 것도 없다. 텅 비어 있음이다.
우리의 유한적인 삶에 허허로움을 더욱 채워 나가야 할 때인 것만큼은
분명한 시기이다. 天空의 떨림을 뚫어져라 살펴보자.
거기 바람의 힘이 존재한다. 알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