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狂氣, 어두운 과거 또는 미래의 희망
濟 雲 堂
2001. 5. 4. 00:04
현재 우리가 내통하고 있는 현실적인 모든 이미지들은 과연 우리들 자신과 균형적인 관계를 지니고 사는 것인가?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일개의 주체로 살아가는 가운데 인간화되어지는 나는 짐승적인 생리와 더불어 이성으로 향하는 본능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현실적 부닥침만이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살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꿈을 꾸기 위하여 무수히도 버려야 하는 희망의 부스러기들은 거리의 사생아처럼 생존을 위해 구걸하러 다니다가 뱃속의 희망으로 채워지기만 하면, 꿈은 다시 꾸어지지 않는 가련함들로 남았던 것은 아니었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초상은 그저 애뜻하게 서로를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공동의 거울을 닦고 쓸어내며 사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시점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까뮈는 말합니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학이다 라고 말입니다.
문학의 범주는 가시화 되고 내적인 갈등의 외적인 표현 일체를 정리 정돈 요약하는 차원에서 탐미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되겠지만 첨가되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열의는 그 것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굳이 문학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을 영위케 하는 일체의 것에 열정을 쏟는 다는 것에는 열정 이상의 뭔가가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그 것을 광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독자적이고 개별적이고 대별되는 가운데 사람의 바다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수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쳤다'라는 말은 육신과 영혼, 외부로 표출되는 모든 통로가 한 방향으로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음악가, 시인, 소설가, 정치가, 등등의 형태 소들에게 '...가'라는 어미가 붙어 다니는 것은 전문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외부로 알리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외부란 사람 개개인을 조직화한 사회 구성체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회 구성체 안에서 개개인의 삶은, 앞서 얘기했듯이 부조리함의 굴레였음을 단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조리는 타파할 수 없는 것일까? 타파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가'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광기의 사회화를 왜? 합법적인 방법으로 전이하지 않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도 광기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데에도 '미치지' 않고서는 사랑이라 말할 수 없고,
문학을 비롯해 모든 부분에서도 '미치지' 않고서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존을 위한 '광기'에 보다 적극적인 표현들이 절실할 때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기'를 좀 더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수 불가결하게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절대절명적으로 우리의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독자적인 삶이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현재적 삶과 그 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공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不面의 대화일지언정 회원님들의 '광기' 어린 대화가 희망의 처음을 열어가는 게 아니냐고 감히 제안합니다.
** 쓸 수 있는 공간의 제한된 환경으로 글 줄기가 딱딱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일개의 주체로 살아가는 가운데 인간화되어지는 나는 짐승적인 생리와 더불어 이성으로 향하는 본능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현실적 부닥침만이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살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꿈을 꾸기 위하여 무수히도 버려야 하는 희망의 부스러기들은 거리의 사생아처럼 생존을 위해 구걸하러 다니다가 뱃속의 희망으로 채워지기만 하면, 꿈은 다시 꾸어지지 않는 가련함들로 남았던 것은 아니었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초상은 그저 애뜻하게 서로를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공동의 거울을 닦고 쓸어내며 사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시점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까뮈는 말합니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학이다 라고 말입니다.
문학의 범주는 가시화 되고 내적인 갈등의 외적인 표현 일체를 정리 정돈 요약하는 차원에서 탐미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되겠지만 첨가되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열의는 그 것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굳이 문학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을 영위케 하는 일체의 것에 열정을 쏟는 다는 것에는 열정 이상의 뭔가가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그 것을 광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독자적이고 개별적이고 대별되는 가운데 사람의 바다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수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쳤다'라는 말은 육신과 영혼, 외부로 표출되는 모든 통로가 한 방향으로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음악가, 시인, 소설가, 정치가, 등등의 형태 소들에게 '...가'라는 어미가 붙어 다니는 것은 전문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외부로 알리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외부란 사람 개개인을 조직화한 사회 구성체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회 구성체 안에서 개개인의 삶은, 앞서 얘기했듯이 부조리함의 굴레였음을 단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조리는 타파할 수 없는 것일까? 타파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가'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광기의 사회화를 왜? 합법적인 방법으로 전이하지 않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도 광기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데에도 '미치지' 않고서는 사랑이라 말할 수 없고,
문학을 비롯해 모든 부분에서도 '미치지' 않고서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존을 위한 '광기'에 보다 적극적인 표현들이 절실할 때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기'를 좀 더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수 불가결하게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절대절명적으로 우리의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독자적인 삶이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현재적 삶과 그 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공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不面의 대화일지언정 회원님들의 '광기' 어린 대화가 희망의 처음을 열어가는 게 아니냐고 감히 제안합니다.
** 쓸 수 있는 공간의 제한된 환경으로 글 줄기가 딱딱했음을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