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遺 言

濟 雲 堂 2000. 10. 16. 15:47

오늘 같은 날은
하늘에 피어
동그랗게 구멍이 난
빛 속으로 절대 그냥 빠져들지 마십시오

그립다고 해서
공해에 찌든 가로수가 품어 낸
새빨간 능금나무에 기대어
행여 술 마실 생각은 마십시오

시거나 텁텁했던 스무 살 가을의 추억일랑은
아예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파리하게 흐느껴 울던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며
첫사랑의 고백으로 애달파 했던, 내게 남은 것은
피를 토하며 울어야 했던 종달새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하늘의 문이 열리고
조그만 구멍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다면
미리 준비해 두었던 遺言狀은 그대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힌다면
내 방에 쌓아 놓은 만 권의 책은 만인에게
내 가슴에 각인된 풀꽃 세상의 종달새 울음譜는 딸들에게
내 전 재산으로 모아진 몇 푼의 돈으로
아들들에게는 나무 의자를 만들게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를 위해 준비한 것은
한 상자의 지우개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덮어씌웠던 상처를 지우고
사랑 때문에 가난하였던 자유를 위하여
두 발 자전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복잡한 거리가 따스하게 다가오고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 정겹게 부딪힙니다.
까칠한 아이들의 눈빛이 파랗게 돌고
내 곁에 서 있는 그대가 담대하게 보입니다.

동네 어귀마다 놓여진 나무 의자
풀꽃처럼 기대어 살다가 사라져도 좋을
아련한 기억 저 편의 나에게
遺言 한 장을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