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아름다운 세기말을 위하여

濟 雲 堂 2000. 9. 24. 01:27
내가 사는 별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기층 안에서
하늘과 바람과 물과 산과 그리고 사람들
서로 속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끊을 수 없는 내력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한 덩어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실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괴함과 신령스러움은 논하지도 말라고 했던 성현(공자)의 말을 가만히 되씹어 보니
역설의 냄세가 물씬 배인 한 향기로 다가옴을 느낀다.
흙을 흙이라 보지 않고 나무를 나무라 보지 않음은 나라고 하는 존재성이
언제고 시간의 깨달음을 게을리 하지만 않는다면 흙이 될 수도 나무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나는 질료적으로 결코 다름이 아니지만 가시적인 공간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가늠의 척도가 분명치는 않지만 적어도 자연을 보면
내 마음과 삶의 동류의식이 합치되는 위대한 순간들이 탄성으로 표현되어 이른바 무아의 지경으로 만들곤 한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 즉,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이라는 공감대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시간적 존재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목울대를 울려가며 그나마 같은 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은 나무의 목소리를 개여울의 싱그러운 외침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바에 우리는 늘 기대고 귀 기우려 대는 원질에 대한 귀속적 속성들이 부분적이나마 제한된 시간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을 따름이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로 구성된 자연의 율조는 우리에게 뭔가 전하려고 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음에도 명증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분명 있기는 있는가 보다.
하물며 내 곁에서 감정의 바탕마저도 드러내며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직무유기는 아닐까?
산에 오르면 산처럼 되고 싶어 사람도 산으로 보이고, 들이나 내로 다가가면 넓고 너른 강물이 되어 사람도 동류로 흘러가는 한 강물이 되는데, 사람 속으로 들어가 사람이 되고 싶어 더군다나 사람의 목소리로 다가서면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마다 등을 돌려대는, 이 어처구니없는 풍경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풍경.
아무래도 나의 별에서는 나를 비롯해 비슷한 생식구조를 지닌 육화된 것들은 노아의 방주를 타고 저 먼 별에서부터 떠내려 온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율격은 자연의 것으로 돌리고 인간의 율격은 인간의 것으로 돌려야 했던 지난 수세기 동안, 친화하지 못했으므로 서로의 적이 됐음을 이제야 깨닫는 판에, 서로 적이 되지 말고 화해하자고 하는 세기말의 외침은 공허한 헌장처럼 빛 바랜 문서로 적의의 공고함을 가속시키고 있기만 하다.
우리는 관용이라는 등기소에 등록시켜야 할 전지구적 이념들이 무수히 많음을 알고 있다. 종교, 국가, 민족, 자본가, 전쟁, 살인, 문화, 몰이해, 불신, 가부장적 사회, 페미니즘, 이반, 첨단 기술, 이단... 소위, 이른바, 대명사, 관형적으로 쓰이는 모든 이름들 속의 기득권을 지닌 자들의 너그러움이 절대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 아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나도 너를 허용하고 친화해 가는 우리의 별 지구에서 기괴함이 결코 이상스럽지 않을 만큼의 아름다운 세기말 풍경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