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다시, 창영동 헌 책방 '아벨'에 간다

濟 雲 堂 2000. 8. 19. 00:55
창영동 헌 책방 골목에 가면
세상의 절반만이 존재한다
내 나이의 절반이었을 적에
술값에 현혹되어 두툼한 法典을 디밀어
맞바꾸고 나면 이미 마음의 절반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던,
창영동 아벨 서점에 가면
이미 절반은 늙어버린 쉰 살의 묵객이
여전히 메마른 검지에 침을 바르고
헬라어 성경 구절을 강독한다

한 때는 자백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독백을 짓누르고 개성이 囹圄 되던 시대였다
리영희, 백기완, 함석헌, 함세웅, 강만길, 조세희, 김지하, 양성우, 문병란...
이 시대 먹물의 절반은 명증한 투명이었다
나의 절반은 숨어서 나의 절반은 회색으로
백주의 동굴 속에서 半獸 半人의 습성으로 자라 왔던...

고서점은 "다리품을 팔아 마음으로 찾아가는 사랑의 고향"이라고
아벨의 곽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서른을 갓 넘긴 외아들의 귀에 박히라! 박히라고 주문하신다.
구석 자리서 꺼내어 든 김영승의 시집 '反省'을 들고 내가 주억거린다

한 때는 고독이 절대 외면 당하던 시대가 있었다
내선 일체가 강요되고 민족은 지배당하던 시대였다
최남선, 김활란, 모윤숙, 이광수, 홍난파, 현재명, 노천명, 김안서, 방응모, 양주동, 주요한, 김팔봉...
그 시대 먹물의 절반은 명확한 일색이었다
나의 절반조차 남모르게 회색으로 물들게 하였던
무지의 시대였음을...

창영동 헌 책방 아벨에 간다
내 생애의 절반이 묵혀 있는 먼지를 떨구고
숨겨진 나를 찾아, 잃어버린 시대를 찾아
내 이름으로 씌어진 시집을 찾아서
다시, 창영동 헌 책방 '아벨'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