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라하면, 엄마 아빠 친구 사랑 등을 꼽을 수 있다. 부모는 자녀의 영혼과 육신을 보육하는 최상의 인큐베이터이자 미래의 길라잡이로서 무게감 넘치는 표현으로 천륜관계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언제 어느 때곤, 아무렇게나 불러도 질리거나 그 의미가 떨어져 약화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요즘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가운데, 천륜의 가치와 행태들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들이 대중 매체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재차 거론조차 부끄러운 우리사회의 민낯이고 돈 중심 사회의 핵심적 병폐현상으로 단언하게 된다.
인류 최고(最古)의 언어로 꼽히는 엄마 아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음상의 유사점과 의미상의 공감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단어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자말에서 친구는 붕(朋)으로 읽히고 있다. 우리말 친구의 개념과는 좀 다른 모양새이지만 같은 뜻을 지닌 단어이다. 우리말의 친구가 ‘친하다’라는 의미의 친(親)자를 사용하는 데 비해, 중국은 붕(朋) 자를 쓰고 일본은 우(友)자를 씀으로 해서 붕우(朋友 펑여우), 우달(友達 도모다치)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의미의 동질성을 뛰어넘어 좀 더 간절하게 다가오는 단어는 단연코 우리말 친구의 친(親)자이다. 나무(木)에 올라서서(立) 오는지를 살펴볼(見) 정도로 기다려지고 찾으려는 의지가 돋보이고, 이를 형상화하여 단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벗’은, 버티다 기대다 등의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다. 삶에 대한 모든 정의는 부모와 스승 그리고 친구(배우자)가 버팀목으로서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정의내릴 수 없는 개념이다. 인류의 빼어난 스승이라 일컫는 사람도 이 범주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걸 보면, 앞서 거론한 아름다운 단어의 생명성은 인류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다른 생명과의 부닥침의 연속이고 변증법적 성장과정을 거쳐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한 생명의 물리적 시간의 한계로 보여 지나, 장구한 인류의 흥망성쇠 과정을 통해 봤을 때는 이 또한 역사의 한 줄기이고 미래의 소산이 된다는 걸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친구 같은 부모, 친구 같은 자식, 친구 같은 배우자 등에 대한 ‘벗’ 의식은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과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단어들이 세상에 넘치듯 흩뿌려 있지만, 정작 꿰어 쓰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즈음이다. ‘나’는 누구의 친구이고 ‘누가’ 나의 친구인지 다시금 되새겨볼 시점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