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 雲 堂 2016. 3. 1. 21:45


현대라는 시간대를 어깨에 짊어진 동시대인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독자적인 섬을 하나씩 들어 올리고 사는 신화의 주인공처럼 고독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게 지혜의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과 그의 동생 아틀라스가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는 하늘의 무게감에 비할까마는, 고독이란 천형을 어느 누구에게도 떠맡길 수 없다는 현실만으로도 그 외로움은, 사람만의 독특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Dialogue)는 둘을 의미하는 Dia와 말씀 또는 논리를 뜻하는 Logue가 만나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그냥 말이 아니고 논리 정연한 말씀을 둘이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거기에는 정제된 말과 목적성을 동반해 한층 성숙한 삶을 지향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대화는 민주적인 삶의 기본행태이고 정치행위의 본질적 덕목으로서 앞으로도 쫓아야할 전 지구적 숙제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 육성이 전제되고 눈을 맞대는 대화보다 침묵이되 비교적 진솔하다고 평가받는 SNS상의 대화가, 실생활 대화에 앞선다는 통계수치가 나왔다. 가족들 간에 식사할 때도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각종 공공교통 수단을 이용하거나 하다못해 길을 걸을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을 보면 예의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83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코네티컷 주의 최장수 부부(John & Ann Betar)의 말에 따르면, “서로간의 헌신과 솔직한 대화가 만들어낸 세월이었다.”고 겸언하는 것으로 보아 여러모로 현대인의 거울이 될 상 싶다. 솔직한 대화는 용서와 불일치라는 동굴을 통과해야 만이 비로소 소통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하루에 10분조차 가족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현실과 익명성으로 포장된 비현실 속의 아바타들이 대화를 대신하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눈동자 굴려가며 침 튀기는 육질적 대화는 더욱 찾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고독의 동반자는 침묵이다. 가톨릭의 영성생활 가운데 ‘대침묵’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선 자들의 수행방법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절대고독’은 군중 속 외로움이라는 질병으로 사회와 담을 쌓게 된다. 현대인의 무수한 질병 가운데 암(癌)은 다른 체세포와 첩첩이 담을 쌓고 소통을 하지 않는 세포를 말한다. 타인과의 소통의 일 번지는 대화이다. 대립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멸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불행한 미래의 씨앗을 심는 일과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요즘 야당 국회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상이 부재한 채, 백여 시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는 진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황망한 공허를 받치는 신화 속 인물들이 절대고독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