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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과 산타클로스의 인천학

濟 雲 堂 2015. 12. 17. 19:23

마름모 모양으로 화강석을 다듬은 축대 위로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담벼락 길은 족히 백 미터쯤은 되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담장 너머로 쭉 뻗어나 있는 것이 마치, “등교시간 늦겠어, 얼른 뛰어.”라고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강철로 만든 커다란 교문이 닫히고 쪽문마저 닫히기 전에 내달리듯 뛰어야 했던 초등학교 등굣길. 행여 늦으면, 정문 오른 쪽 담장에 넝쿨처럼 기생하듯 차려진 구내이발소 뒷문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안 씨 아저씨’ 문방구 샛길로 올라가 화장실이 보이는 계단으로 갈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헐렁한 가방을 좌우로 흔들며 부리나케 달려가는 친구들의 대열이 멈추지 않았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신문 한 부를 사들고 들어가는 여유를 가끔 부리기도 했었다. 신문 값 한 달 치를 미리 낸 친구들을 족집게처럼 짚어내 신문을 건네는 배달 아저씨의 신기에 가까운 기억력에 미소를 보탠 조잘거림은, 이따금 씩 교실 안까지 따라 들어오기도 했었다.

 

‘소년C일보’는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인기였던 ‘풍운아 홍길동’을 연재하고 있었다. 만화가 신동우가 그려낸 홍길동은 간결한 선과 웃음 이미지, 부정한 무리들을 골탕 먹이는, 한마디로 정의의 화신이었다. 변신술 검술 축지법 등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려 꿈을 키웠던 아이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이후,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홍길동에 대한 상징적 기대감은 스스로 성장판을 닫아버린, 여느 도시 아이들처럼 무심하게 변하고 말았다. 변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만화적 삶과 현실과의 괴리는 어쩌면, 서로 정면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무한궤도처럼 영원히 닿지 않는 길이란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시기였다. 획일적인 검정색 교복을 입어야 했고 제 몸집만한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으며, 부족한 살림일지언정 엄마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마저 적나라하게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마치 홍길동처럼 익명을 가장해 매년 이맘 때, 선물과 현금을 준다는 기인을 접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에 대한 이설은 많았다. 터키 출신이라든지, 북유럽 사람인데 미국에서 선물을 나눠주다 길을 잃어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라든지 등등의 말들이 넘쳐났다. 미군의 인천 주둔을 시발로 크리스마스가 전국적으로 대중화되었다지만, 홍길동 만화를 통해 우리식 이상세계 ‘율도국’을 전수받은 필자의 심사에는 의문의 심지가 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이종언어 발화현상으로 불리는 제노글로시(Xenoglossy) 다시 말해서, 외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도 그랬더랬다. 요즘 버전으로 달리 표현해 본다면, 외모로 드러나는 초고도 비만에 붉어진 코로 추정컨대 음주운전도 의심스럽고, 상대국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월경한다거나 굴뚝을 통해 남의 집을 무단 침입해 원치 않는 선물을 함부로 준다는 점. 또한, 애꿎은 루돌프 사슴 네 마리를 붙잡아다가 밤새도록 혹사시킨다는 불명예 이미지가 따라 붙을 수 있을 거란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구 역사상 인간이 내놓은 마지막 선물이었을 산타클로스의 역할론에 헤살 놓는 게 아니니만큼, 이 무렵에 던지는 가벼운 농담보따리쯤으로 봐주었으면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중의 고단한 삶 속 깊이 침잠해 있는 영웅적 서사시들이 한소끔 씩 솟구쳐 오를 때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려운 시기 때마다 그랬고, 언제나 그렇듯 늘상의 오늘이 익명의 누군가에게는 그날일 수도 있겠다는 이해심이 전이되는 세상이 되었다. 역시 변하지 않는 변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여전히 철부지 시절처럼 영웅주의 사관에 그을린 초월적 존재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않는 ‘모순수요’적 삶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더 좋고 더 편리하고 더 이로운 것을 만들고자 했으며, 더 나은 인물에 더 훌륭한 인품을 가진 리더 그룹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걸 보면, 점점 더 현대 시민의 자화상은 소시민적 무력감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개미처럼, 집단 지능적 존재로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결국 영원할 것 같았던 인간의 존재감에 금이 가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이맘 때, 그 누군가에 대한 기대감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연말이다. 앞으로 열 사흗날만 지나면 이제껏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2016년 병신년 원숭이해가 된다. 누군가를 위해 산타와 홍길동 노릇을 해 본적은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올해는 그 누군가의 ‘무엇’이 돼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서부터 일고 있다. 원숭이 재주 피우듯 나무 위에 올라서서 동료를 위해 망을 보는 일이어도 좋고, 영혼을 다 태워버려 재로 남은 희멀건 연탄을 치우는 일이라도 당장에 해야 할 것이다. 마음씨 좋은 산타,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을 말끔히 지우는 일이 우선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