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설주에 풍경을 달며
마음은 스산했다. 노랗게 익어버린 은행잎들이 노견에 걸터앉아 젖은 몸을 쓸어내리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연일, 무시로 내린 비로 인해 한껏 높아진 하늘 높이만큼의 공허를 채울 겨울바람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장미 한 송이 때문이었다. 프랑스 파리 바타클랑 클럽에서 난사된 총알이 구멍을 낸 유리창 밖 볼테르 거리는 구멍만한 크기로 오목하게 있었을 것이다. 곧이어 볼록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누군가가 장미꽃으로 구멍을 매우고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로이터 통신이 찍어 보낸 한 장의 사진에는 ‘왜?’라는 쪽지를 함께 첨부하여, 구멍 뚫린 세상을 꽃으로라도 틀어막아보려는 생생한 모습을 전 세계에 보도하였다. 그래서인지 겨우 입동을 넘긴 초겨울 문설주는 더욱 스산하였다.
한 번 꿰맨 상처를 완벽하게 복원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구멍 난 창에 장미를 꽂는다한들 부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게워낼 수 있는 망각이란 처방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죄다 상처투성이고 망각으로 점철된 뾰족한 돌밭 길을 비틀거리며 외롭게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평화를 얻기 위한 최선의 수단은 투쟁(루돌프 폰 예링)’이란 말이 어렴풋 리셋 되고 있다. 거꾸로 등치시켜 ‘투쟁을 하려면 평화를 전제로 투쟁하라(프란치스코 교황)’라는 말로 바꿔 놓으니, 신기루처럼 고즈넉한 오솔길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하는 연애는 사랑이고, 네가 하는 사랑은 불륜’이란 잣대가 판을 치는 가운데, 파리 발 ‘나의 죽음은 순교이고, 너 네들의 죽음은 개죽음이어야 하며 수단’일 뿐이라는 망령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게 여전히 증명되고 있었다. 언필칭, 사랑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이라고 우짖는 자들이 그렇듯, 잔혹한 괴물로 변신해버렸기 때문이다.
파리를 위해 기도하자(Pray for Paris)는 구호가 SNS에 밀물처럼 들이닥칠 때, 누군가 인천을, 조국을 위해서도 기도하자는 구호를 역으로 내둘러 버렸다. ‘너나 잘해’라고 되받아치는 말 속에는 여전히 생략된 미결의 상황들이 흘러넘친다는 뜻으로 풀이 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위시해서 메르스 사태 등 최근의 굵직굵직한 국가적 재난을 제대로 풀지 못하는 상황도 그러려니와, 근자에 광화문 평화시위에 대한 광폭한 물대포 저지로 생명이 위태로운 농민(백남기 69세)의 일도 딴 나라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울러 인천 성모병원 사태에 대한 정확한 진상도 규명과 해법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한편,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말(권리를 위한 투쟁)과 프란치스코 교황(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빈민가 방문 강론)의 말의 공통점은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숙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꼽아보게 된다.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차제에 다시 한 번 강조컨대, ‘꽃으로라도 때려서는 안 된다’가 분명히 맞는 말이다.
정의는 구멍 난 세상을 한 송이 장미로 틀어막음으로서 상처를 치유하려 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수천도로 끓고 있는 폭발물이었다. 마그마의 연한 속살일지라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뜨거움이 액체처럼 흐르고, 그 지층 밖에 가루처럼 살을 부대끼며 옹기종기 쌓은 흙더미 세상. 더군다나 생명이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은 돌멩이 가득한 밭에서 아, 서럽게 피어난 그 장미 한 송이 뜯어다가 지구의 허점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정의의 성정이었는지, 여전히 의문스럽다. 여하튼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임에 틀림없는 지구인이었다.
지구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했다. 불안스럽다. 파리 몇 군데가 구멍이 났으므로 이를 틀어막자고 몇몇 나라에서 전폭기를 날리고 항공모함을 띄우고 미사일을 쏘아 구멍을 낸 배후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기사를 곧 접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그 구멍이 생겨났다. 장밋빛으로 그려 넣은 지난 역사를 국민 전체에게 획일적으로 이데올로기화 하겠다는 것이다. 불안이 증폭된다. 같은 장미의 성정을 이어받았음에도 불경스럽게 장미로 후려치려는 태도들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존재감은 상처를 통해서 더욱 빛이 발한다는 것을 경험한 인류에게 가학 장치는 여전히 타이머를 작동시키고 있다. 지독하게 반복적이다. 인간의 회복기가 요원하게 보인다. 어차피 상처일거면 부드러운 고통이 낫고, 구멍이라면 애틋하게 어루만져주는 살 꽂이로 넣어주는 게 낫다. 그 속에서 평화가 자라고 정녕 꽃이 피지 않겠는가 말이다. 초겨울, 문설주에 풍경 몇 개를 달았다. 바람이 불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방울소리 한 번 쯤 울리고 다녀가시라고, 행여 사람이 드나들더라도 기분 좋은 울림으로 마른 가슴을 적셔보라고, 찬바람 들거들랑 구멍 난 머릿속 따수운 입김으로 채우라고 풍경을 몇 개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