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선 안 된다
‘안 된다’를 한자로, 계(戒)나 금(禁)으로 옮긴다. 사람을 위협하듯 창이 그려진 계나, 나무로 담을 쌓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금 자는 주로, 힘없는 자에게 ‘해서는 안 될’ 상징적 문자이다. 유사 이래, 적어도 수천 년 동안 그랬더랬다. 문자는 정보의 전달과 획득 과정을 정확하게 인식시켜주는 체계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정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순구조를 통시적으로 갖게 된다. 역리현상이다. 내가 이롭자고 남을 구속하거나, 모두가 편해지자고 소수를 종속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명(命)과 령(令)을 붙이게 되면, 좀 더 강한 이미지가 첨부되어 ‘벌’ 내지는 모종의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이 내포된다. 어쨌든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천형처럼 잇니 배긴 단어가 ‘안 됨’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움켜쥔 집단의 논리와 통치시스템에는 ‘안 됨’이 난무하다. 하부집단을 천덕꾸러기 대접하고, 대다수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해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고 구조화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짓거리가 ‘안 됨’의 연발이다. 그래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생겨났고, 첫째가 꼬래비가 되고 밑바닥에 있던 자가 첫째가 된다는 신앙이 생겨났다. ‘모든 것이 영원할 수도, 고착될 수도 없다’는 상식이 비로소 통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권력자들이 유용하게 써 먹던 금이나 계가 많은 사회는 신뢰감이 떨어지고 자유정신이 쇄락해 후진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결과의 일부이다.
요즘, 추운 날씨임에도 학계를 비롯해 종교계를 들썩이게 하는 입 바람이 인천을 달구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인천 국제 성모병원’ 사태가 그 것이다. 사안은 좀 다른 듯하지만,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양식의 대뇌에 넣고 흔들면 상식적인 세상에서 비상식적 논리들이 앙금처럼 남아 있다는 데에 문제가 비롯된다. 어느 쪽 어깨가 강한지, 겨루는 한판 씨름처럼 샅바를 서로 죄고 있는 형국처럼 보인다. 분명하게 상식과 정의로움이 통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판단이다. 언제나 그렇듯 물리적으로 힘에 세 보이는 기득권자들의 압승이 예상되지만, 민주주의를 몸소 실현한 작금 세대에게는 사회적 정의와 상식을 외치는 쪽으로 여전히 마음의 추가 돌려져 있다. 다만, ‘이룸’의 시기가 언제인지 그 게 궁금할 따름이다.
역사의 강은 흩어져 있는 지류들을 흡수해야 큰물이 되고 비로소 역사의 바다로 흐른다. 다양한 물길을 타고 강물에 몸을 던진 역사는 제대로 흘러가기 위하여 수 없이 많은 원수(原水)를 수용해야 한다. 제 몸을 던지는 그 자체가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보는 이에 따라 모양새도 달라지고 인식도 다르게 나타난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후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났다. 강력한 군주 국가였던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는 서양사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고 프랑스 혁명 당시 이를 비판했던 세력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은 진즉에 기술돼 있다. 그러나 최근의 프랑스 문화사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시대를 뛰어 넘는 빼어난 패션니스타로 재조명하고 있다. 유행을 쫓는 패션니스트가 아니라, 주도했다는 이야기다. 세계 패션계를 주도했던 프랑스다운 기발한 발상이다. 역으로 우리 상황에 접목해 보니, 다양성과 객관성, 시대성을 모조리 정부가 통제하려는, 이른바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는 어딘가 덜 떨어진, 치기어린 정부의 몸부림으로 비춰지고 있다. 비상식의 상식적 상황을 연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에 그치지 않은 비상식적 싸움이 또 있다. 싸움이라 규정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연일 릴레이 단식 농성을 벌이는 당사자들을 보면 안쓰럽게도 일방적이다. 큰 그림에서 보면, 대한민국 10%가 천주교 신자이고 그 가운데 10%가 인천의 신자 수인데, 농성의 애절함에 귀 기울이는 이는 단 0.1%도 안 된다는 거다. 내용의 진위는 물론이고 전말은 언젠가 밝혀질 일이지만, 무엇보다 관심의 영역 밖이거나 천주교라는 권위 앞에 다들 청맹과니처럼 답동성당 어귀를 무심히 지나치는 걸 보니, 과연 사랑의 실천을 배우려는 자들인지 의심이 든다. 거리에 나 앉은 사람을 보면 궁금해서라도 쳐다볼 터. 아니, ‘성모’의 이름을 걸고 의료행위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병원의 부정한 사실을 조치해달라고 요구하면, 들어주는 시늉이라 했을 법한데 전혀 그러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약관화하다. 권력과 기득권 앞에 무릎 꿇은 거고, 돈이란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거친 광야 생활에서 얻은 모세의 십계명(十誡命)엔 죄다 ‘하지 마라’로 도배돼 있다. 역설하지만, 적어도 상식과 정의 앞에서, 정녕 그러면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