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를 재고함
성호(聖號) 외며 십자가를 긋지 않으면 밥을 못 먹게 했던 부모님이셨다. 당신의 부모님이 그랬고, 그 당신의 부모님께서도 그러셨듯이 말이다. 제일 큰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숟가락을 들라치면 사나운 눈초리를 쏘아붙이며 저지하는 것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밥상에 팔꿈치 대고 밥을 먹어서도 안 되고, 말을 하거나 일어났다 앉았다 어수선 떨어서도 안 되었다. 밥상머리에 놓인 모든 음식은 약식 절차를 거쳐야 했고, 다 먹었다손 치더라도 웃어른의 허락이 떨어져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이러했던 상황은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그 삼엄함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에 따른 습관은 학교 점심시간에 자연스럽게 성호를 긋게 됨에 따라 다른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호불호를 떠나 밥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까지도 밥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릴 적 경험이 더해져,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는 상징으로서 몸에 배게 하였다.
우리에게 밥의 의미는 주로 쌀로 지어진 것을 말했다. 고메(Jp) 말락킷(Phil) 가오(Vt) 까우(Thai) 짜왈(Ind) 미(Cn) 아르쓰(Mex) 구르츠(Uzb) 라이스(Uk) 나시(Indones) 등은 여러 나라에서 불리는 쌀의 이름들이다. 다양한 이름을 가졌지만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들 나라를 여행하다보면 밥을 대하며 먹는 태도와 일체의 의식들과 비교해 우리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음에 다수 놀라게 된다. 밥상에 팔꿈치를 올리거나 턱을 괴고 먹어서는 안 되고 밥 알 하나라도 떨어뜨리거나 수선스럽게 식사를 해서는 안 되는 문화의 교차점이 미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웃어른을 중심으로 식사의 시작과 마침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놀라운 공감대를 발견하였다. 밥으로서 하나가 되고, 밥을 하늘처럼 모시고 그 하늘을 모시는 사람이 곧 하늘이 되는 사상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시작과 마침은 우리처럼 밥상머리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였다.
현대인에게 저장된 지난 한 세대의 시간은 그야말로 급변과 다변으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밥상머리에서 집단적이고 결집력을 드러냈던 풍속의 변화는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어머니의 노고 깃든 밥상 문화가 바깥음식을 자주 먹게 되는 형태로 바뀌다보니, 집안 살림의 변화는 물론이고 외식에 대한 편리성과 다양성을 쫓는 구조로 급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발 패스트푸드의 점령은 밥상 공동체에 대한 의식구조와 철학을 일순간에 변화시키는 강력한 아이콘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집 밥의 쇠퇴는 가족의 역할을 다분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역할이 외적으로 확장되었고 아버지의 의미가 퇴색되었으며, 자녀들 또한 본능적으로 변화에 적응하는 행태가 되었던 것이다. 즉석식과 외식을 동일선상에 놓고 본 외형만 보더라도 집의 역할이 확실히 달라진 것만은 분명했다.
쌀의 소비적 측면에서 살피면 이러한 변화는 극명히 도드라져 보이고 있다. 1984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민 일인당 쌀 소비량은 130kg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무게감은 일 년간 한 가마 반 이상이 국민 한 사람이 밥을 해먹는 쌀의 양이었다. 이후 한 세대를 거친 2014년에는 지난 세대의 몫에서 절반을 겨우 넘긴 67kg밖에 쌀을 소비하지 않았다는 조사결과와 대비했을 때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매년 쌀의 풍작 소식을 듣지만 줄어드는 소비 인구와 쌀 소비량에 쌀값 안정을 요구하는 농민의 목소리도 각을 세우고 있음도 전해 듣는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십분의 일 격인 40만 톤의 외국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볼 때,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쌀 과자니 떡과 떡볶이니 쌀국수 등 소비 패턴을 바꾸는 노력들이 보이긴 하지만, 패스트푸드라는 단어 뜻처럼 속도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적 측면에서는, 갈 길이 너무 먼 실정임을 절감하게 된다. 외식 산업의 비약적 발전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우리 산업경제의 진화적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장점이 스며들지 않은 채 서구화로 치닫다 보니, 부작용의 한 행태로서 쌀 소비가 줄었다는 점도 도외시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밥이 하늘이고 그 밥을 먹는 사람이 하늘이 되는 시대는 분명 지났다. 그럼에도 밥은 사람을 만드는 큰 스승이라는 점을 누구나 알기에, 여전히 밥상머리 철학은 그 가치로서 만도 위대한 행위라 하겠다. 가족의 분열이 핵가족 시대를 주도했고 더 증폭된 형태로 이름뿐인 가족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상태로 치닫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말았다. 손에 물을 묻혀가며 쌀을 씻고 밥통에 쌀을 얹고 김 모락모락 펴오르는 밥상을 기다렸던 환경에서,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즉석에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함의 뒤란에는, 공허와 이기심과 자본주의의 검은 연기만 펴오를 뿐이었다. 올해도 풍년을 예감하고 있다. 이상기후와의 처절한 혈투 끝에 얻은 수확이라 더욱 값지게 들리고 있다. 밥상머리를 추억하는 세대들의 고군분투가 더욱 기다려지는 만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