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미숙한 것의 아름다움

濟 雲 堂 2015. 10. 8. 17:28

    사람의 정의를 ‘삶을 알아가는 존재’라 하는데 여전히 방점을 찍는다. 인생이 그래야 한다는 말에도 엄지를 꾹 눌러본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만족스럽기 보다는 실수와 허술함이 더 많아 켕기는 마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쌓인 마음의 짐은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다. 여하간 이러구러 생각들이 반성의 울타리를 기웃거리는 이유는 비로소 가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화기에 닳아 물을 찾게 되고 시원한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 앉아버리다가 맑고 높은 하늘, 서늘한 새벽바람에 여름 버전에 맞춘 몸은 여지없이 비틀거리고 만다. 반복적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감지해 내는 놀라움 이면에는 얍삽한 사람의 마음도 읽혀지고 있다. 태생이 그렇고 지능의 원죄가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고 외치는 순간, 혹독한 겨울이 북방 하늘에서 몸을 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니 반성할 틈도, 준비할 여지도 없이 인생의 바퀴는 그저 돌고 돌 뿐, 다가오는 시간의 정면을 외면하며 살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이에, 미숙한 삶이 아름답다고 말한 의미가 밝혀지게 된다. ‘아름답다’는 ‘안다’라는 말의 뿌리를 갖고 있는 고로, 모든 인간의 미숙함은 제 스스로 알고 있으니, 제 꼴값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제 꼴값을 ‘안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맞서 미추(美醜)를 구분 못하고 사람값을 못하는 일들이 우리 삶 주변에 만연해 있음이 살펴진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대표적이다. 잘못된 역사를, 아니 권력집단이 제 멋대로 꾸려 놓은 역사를 통제하고 독재(獨裁)를 미화하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른바 ‘국정교과서’인데, 대다수의 교육자와 역사학자들이 찬동하는 공영과 민주시민사회의 논리를 버젓이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다. 제 앞에 놓인 길만 볼 것이 아니라 눈을 돌려 타자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세월호 비극, 메르스 사태, 아베의 헌법 9조(평화헌법) 개정, 정신대 문제, 경제 침체의 악순환과 대기업 집중현상, 극동 국가들의 기묘한 정치적 관계,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모병원 사건, 자유공원과 월미도에서 여전히 진행형인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행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단지 외적인, 나와 관계없는 사건들로 이해한다면, 죄다 익명성을 가진 ‘너’만 있고 실존하는 ‘나’는 그저 뜬 구름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감히 전언하고 싶다.

 

     “현재의 나와 관계없는 것은 없다”라는 논리를 눈여겨보면, 넓은 오지랖처럼 뱃심 넓고 치기 어리게 보일지는 몰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깊은 정의감이 샘물처럼 느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한 세기를 이념적으로 양분해 갈라놓은 당사자의 말이라 치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정의가 느껴지는 논지로 보이고 있다.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우리 삶의 지난 궤적에 의하면, 모든 가치의 기준점은 부표처럼 현장에 떠있는 지침서에 불과한 ‘가변적 진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에 유일하게 마침표가 찍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자신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타자 중심으로도 봐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씀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타자의 세상에 자신을 내어주지만 겸허하고 줏대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미숙하되 완숙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로 정의 내리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미숙함 투성이다. 일본 야마가타 현 야마가타 시에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 후나코시 다쿠미는 결혼과 한일관계 정상화, 일본 극우 꼴통들의 꼭두각시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 누구보다 비판적인 젊은이다. “섞여야 함께 살 수”있다는 필자의 말에 적극 동의하던 고등학교 선생이기도 했다. 막상 동조했던 의사표명 말꼬리에 어떻게 섞여야 살 수 있냐는 방법론을 다시 물어왔다. 부딪치면서 싸우면서라도 말은 섞여야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잠도 함께, 서로 단절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답하고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북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으면서, 중국 어선들이 빤히 보이는 영해에서 조업하는 걸 방치하면서, 엊그제 대중일보 정통성 계승문제로 본보의 위상정립에 한 몫도 못하면서, 뻔뻔하게 태연송사(泰然送辭)를 날렸던 것이 화살 되어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미숙함의 어쩔 수 없음을 미화해버리는 못된 습관이 또 불거져 나왔고 이후, 반성의 기미가 사그라질 무렵엔 아무렇지 않게 어른 노릇하듯 헛기침으로 위장해버린 게 못내 부끄럽기도 했다. 여하튼 가을이다. 가뜩이나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드는데, 바람 한 점에도 낙엽들이 휘리릭 떨어지는 경고지절(警告之節)에 허파를 가득 채운 헛바람을 어디에 쏟아낼까 심히 걱정스러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