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에 떠올리는 지난 풍경들
육곳간을 운영하는 왕 씨 댁은 추석 전날까지 뭔가를 포장하느라 바지런 떨고 있다. 빨강 종이 상자에 금박 글씨가 새겨진 포장 안에는 우윳빛 기름종이로 가지런히 덮은 월병이 들어있었다. 아이 주먹만 하게 만든 동그란 월병에 담긴, 보름달 같은 마음은 친분이 있거나 주변 거래처 등에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포장된 월병은 붉은팥을 소로 넣은 것도 있고 대추를 반죽해 넣은 것도 있었다. 용(龍), 복(福), 연(蓮) 등 중국인이 선호하는 문양을 조각한 무즈(模具)로 무늬를 내 화덕에 구운 것인데, 뭐니 뭐니 해도 볶은 흰팥에 견과류를 잔뜩 넣은 월병이 입맛을 유혹하곤 했었다. 그러나 평소 쉽게 구해 먹을 수 없었기에 추석 때만 되면 마음을 열고 건네주는 화교들과의 교분을 확인하는 척도로 판단되기도 했던 월병은 요즘, 청관 일대를 비롯해 신포시장에서도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여타 지방의 풍습과 달리 인천, 특히 화교들이 다수 살고 있던 신포동, 북성동, 인현동 등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돈을 소로 넣어 한해의 복을 기원하며 먹던 설 만두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같은 마음으로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훌륭한 풍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여름을 건너온 시간들이 축 늘어진 어깨를 쫑긋 세우는 절기를 가을로 부르는 의미 뒤에는, 결실의 상징인 과일이란 단어와 연관성이 매우 높은 슬기로움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왜색 짙은 사과의 이름들이 판치던 시절이었으니 국광, 홍옥, 아오리, 부사 등을 비롯해 인도사과(골든 딜리셔스)라 부르던 푸석푸석한 식감의 사과가 우리의 가을을 장식하곤 했었다. 찬바람이 들어찬 절기에 유통되던 사과나 배가 어쩌다 선물로 들어올라치면, 여섯 면이 모두 밀봉된 직사각형의 나무궤짝이 몇 상자 씩 쌓이곤 했었다. 요즘처럼 매끈한 종이 상자에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비닐을 씌운 것과 비교해 보면, 우직스럽지만 차라리 질박한 우리네 정서에 맞닿아 있었다. 궤짝을 메운 판자 한 쪽을 뜯어내면 누런 쌀겨들이 오소소 흘러내렸다. 쌀겨의 무덤을 헤쳐 끄집어낸 사과를 오지랖이나 마른 헝겊으로 쓱 한번 닦아내고 씨앗까지 모두 먹어버려야 ‘용감한 놈’으로 인정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몰래 꺼내먹는 즐거움은 빼놓을 수 없는 스릴이었다. 여하간, 소매를 걷은 채 휘휘 저으며 사과를 찾다가 팔뚝에 상처가 난다거나, 방구들에 쌀겨를 쏟아내 어머니께 혼났던 시절은 화석처럼 오래된 기억이 돼버렸다.
신포시장은 1927년 7월 1일에 개장돼 근대 시장으로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연륜을 지닌 곳이다. 그런 곳이니만큼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고 조수의 흐름처럼 사람들의 변동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천에 갓 정착했지만 힘들게 살림을 꾸려가던 한 중년남자의 사연이었다. 얼마나 고되었는지는 몰라도 망연자실한 생활에 구걸하기 일쑤여서 주위 분들로부터 잔소리를 밥 먹듯이 듣는 실정이었다. 어머니는 그 때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얻어먹으려는 그 힘 가지고 일을 하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한 동안 떡집 일을 돕기도 했었기에 아저씨는 어머니를 스승처럼 따르기도 했던 기억도 아스라하다.
좀도둑 천지였던 시장 풍경도 잊을 수 없는 그림으로 자리 잡는다. 어느 날은 누구네 집 물건이 없어졌다 했으며, 돈 통을 통째로 잃은 집들도 다반사로 많았었다. 죄다 생계형 절도들이었다. 좀도둑은 예나 제나 일상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해프닝처럼 단순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경계와 불신을 동반해 동네 분위기를 뜨악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엊그제, 필자 또한 그런 일을 당한 입장에서 씨씨티브이를 설치해야 한다느니, 자물쇠장치를 최신으로 해야 한다느니 동네의 모든 감시 카메라를 동원해 꼭이 잡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들이 있었다. 중히 여기는 것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세간에 그리해서 뭐하나 했지만, 정작 노트북을 통째로 잃고 나니 그 충격은 말할 수 없었다. 요행한 것은 잃어버린 다음 날 새벽, 범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가 비닐에 담은 노트북을 떡 좌판 아래에 도로 갖다 놨다는 거였다. 푼돈일지도 모를 돈 통의 돈과 출판기념회를 통해 대강 없이 답지된 만 원짜리 몇 십장의 흔적은 충분히 용서가 가능했다. 몇 년간 썼던 원고와 수 만장에 달하는 사진자료가 모두 온전히 돌아온 판에 그저 ‘하느님 땡큐’만 연발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가업일지언정 좀도둑의 출연으로 긴장의 최강 모드로 전환되었다가 결국엔 풀렸지만, 이맘때 시장 상인들의 투라우마처럼 필자도 예외가 아닌 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일 모레면 추석이다. 한 해 가운데 가장 밝고 의미가 드높은 보름에 바람을 적어볼 일이 또 하나 생겼다. 필자의 낡은 노트북을 온전하게 되돌려준 묘령의 여인에게도 한가위 마음이 전해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