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진면목
면목은 원래 얼굴의 생김새를 의미하는 단어지만, 체면과 도리 등 처신과 관련된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얼과 꼴이 합체돼 만들어진 얼굴이란 단어가 면목보다 더 깊은 철학적 요소를 지녔지만, 표현 자체가 직선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점에서 잠시 주저거렸다. 직선적 의미가 주는 공격 이미지도 마음에 걸렸다. 곧이곧대로 보이는 민낯도 나쁘진 않지만 올곧이 전달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부정의 그물에 잡혔기 때문이다. 표현 방식을 좀 달리해 인천의 면모를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발상은 소동파의 시 <여산 진면목>에 ‘여산을 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내용을 기둥 삼아 ‘인천 진면목’이라 붙여 보았다는 게 변이라면 변이었다. 결론이 드러난 셈이다. 인천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거였다.
국내 대다수의 도시들이 저마다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창조의 시대를 일구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시대 창조 또는 창조론이 추구하는 본질은 돈과 삶의 질을 증폭시키자는 것이다. 대구의 ‘창조도시’ 광주의 ‘아시아 문화 중심 도시’ 경주의 ‘역사 문화 도시’ 그리고 요즘 인천이 쫓는 ‘가치 재창조 도시’ 등은 같은 얼굴에 화장만 달리한 ‘이구동성’이었다. 여러모로 따져보아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의 점잖은 표현이다. 여태 그렇지 않게 살아왔다는 반증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자극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은 원래 그러니까 돈과 권력을 위임 받은 힘 있는 자의 ‘핸들링’에 속절없이 쫓아다녀야 하는지 헷갈리고 있다. 마치 사회층 저변에 대다수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철학도 문화도 신념도 없이 살아가는 무지렁이처럼 간주되는 풍토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남의 것을 베껴야만 살 수 있는지 그 의혹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인천의 ‘진짜 얼굴’을 인천 ‘진면목’이라 달리 표현해 보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말이다.
얼마 전, 시흥시가 처음으로 ‘코리아 문화 수도’로 선정됐다고 도하 신문들이 떠들썩하게 장식했다. 수도는 수도인데, 문화 수도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창조도시론’이란 큰 맥락의 한 줄기이다. 유럽 사회가 1980년 대 중반에 경제와 정치적 악순환의 물꼬를 트고자 주창했던 것이 ‘문화 수도’였다. 이에 따라 유럽의 각 나라들은 상징적 문화 수도를 선정해 ‘하나의 유럽’을 기치로 삼아 역사와 문화, 전통의 보전과 현재적 삶의 질을 타개하자는 데에 입을 모은 게 그 처음이었다. 경제적 회생은 물론 독일 통일과 소련의 붕괴 등에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는 게 뒷말로 남는다. 긍정의 여파는 아랍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로 묶는 것으로 이어졌고, 21세기 들어서 남아메리카 대륙이 그 바통을 이어 받아 ‘문화 수도’ 지정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의주시했던 결과가 우리에게도 전해졌으니 뭔가가 창출될 것이란 조심스런 판단이 앞서지만, 이도 역시 석연찮은 ‘남의 식사 방법’일 따름이다.
인천은 다양성이 혼재된 도시다. 다양의 정의를 한마디로 풀어낼 수 없지만, 역사와 문화 지방과 민족 등 큰 틀에서 볼 때 다양성을 배제할 수 없는 공간이 틀림없다. 수도권 각 도시를 제외한 지방의 도시 군들을 비교했을 때 특별한 지방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덧붙여 인천은 현 세기적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풀어야 할 공통분모를 숙제로 떠안은 도시이기도 하다.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의 말마따나 독자적 예술문화, 지속적이며 내생적인 발전을 위해 새로운 산업의 창출 능력이 자유롭게 창조적 활동을 통해 도시 경제 시스템으로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이도 역시 ‘남의 말’이다. 자주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이 빠졌기 때문이다. 개념 정의에 부정적이긴 하지만,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의 ‘창조 계급의 부상’은 또 다른 대안으로 발견된다. 다만, 계급을 ‘계층’이란 말로 바꿔 적용하면 좀 더 근사한 표현으로 근접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오리무중의 숙제 해결을 실낱처럼 제시한 것은 멀리서 찾아든 두 외국인 학자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 있음을 발견한다.
<문화바람>은 십년 가까이 일본 ‘우타고에(うたごえ 노랫소리) 합창단 연합’ 소속 <일어서라>합창단과 노래로 교류해 오고 있었다. 다름과 차이를 떠나 ‘평화’를 주제로 아픈 역사와 현실을 극복하고자 일개 단체들이 뜻을 모은 것이었다.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작은 충돌과 그 감동의 파장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올해도 여지없이 평화의 노랫소리는 인천에 울려 퍼졌다. 어쨌든 문화 주도 계층의 창조성과 열정이 빚어낸 변화의 물꼬는 미래를 담보하는 주요 단서가 된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인천의 면목을 만드는 건 작은 시작의 지속적 조합이 하나하나 쌓여 진면목이 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