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그 봄이 아니므로
겨우내 몸 사리고 있던 만상이 들썩이고 있다.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는 것 같고, 바싹 메말라 보이던 생강나무도 노랗게 봉오리가 곧 맺힐 것처럼 보였다. 봄볕 탓이다. 그런데, 봄볕 ‘탓’이라 쓰고 보니 책임전가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봄 저고리에 겨울 옷섶처럼 진부하게 느껴졌다. 말을 바꿔, 봄볕 ‘덕분에’라고 쓰니 점잖은 느낌은 드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도 적절한 단어가 아니라고 절레절레 저어본다. 만물에 생기를 불어 넣지만 무생물 취급을 받고, 만성적 경기 침체 등 달갑지 않은 겨울 소식들이 우리사회를 더욱 냉각시켰던 고로, 봄볕 ‘탓’이라고 다시 거칠게 몰아 써본다.
느닷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가 지저분해 보였다. 창도 닦아보고 놓인 물건들도 재배치해보고 이웃집 마당도 쓸어 보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줍고 또 주워도 어느 틈에 버려진 담배꽁초. 이웃 식당들이 출처일 이쑤시개와 휴지조각들, 어묵꽂이를 비롯해 감자꽂이, 슬러시 담던 용기, 종이컵, 각종 전단지와 쓰레기들. 아아, 각양각색의 ‘문화의 거리’와 ‘특화시장’ 등 특성화된 이름을 내걸고 관광 명소임을 자처하던 동네의 민낯은 쓰레기더미였다. 얼마 전, 부산진구 청소용역 업체가 파업과 폐업을 연이음에 따라 쓰레기 대란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으며, 우리 같으면 어떤 결과와 대응을 했을까 고심해 보았다. 먹어대는 것은 세계 정상급 수준인데, 버리는 문화는 여전히 저급한 수준인 우리 사회가, 제시할 좌표도 없이 동력을 잃은 채 표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대 행정대학원 주관으로 전국 230개 기초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주무 관청에 대한 주민 만족도와 행복지수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었다. 놀랍게도 상위 20위권 안에 포함된 구는 유일하게 인천 남구뿐이었다. 인천의 10개 구.군 가운데 남구는 2천년 인천의 역사를 아우르지만 대표적인 구도심이어서 도시 성장의 문제점이 어느 지역보다 많은 곳으로 알려진 바 있다. 천혜의 바다자원과 우리나라 역사를 총괄하는 도서지, 근현대 역사의 바탕골인 지역, 서울과 접근성이 좋은 지역, 정비가 잘된 신도시 등을 제치고 남구가 선정됐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의 한 지역구가 높은 점수를 받은 것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동시에 타 기초 자치단체의 위상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1995년 지자체 실시 이후, 인천의 모든 기초 자치단체들이 ‘역사와 문화’를 구정의 큰 틀로 삼아 주력했던 걸 비춰볼 때 초라한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부언하면, 단체장의 치적주의와 도시 외적인 변화를 쫓아 표피적 사업들에 치중했던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실질적 주민의 삶과 행복은 도외시한 채 일방적이고 편향된 방식으로 전이되었을 거란 우려가 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남구의 행정 행태와 그 방식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이 타 구에도 요구되는 건 당연지사다.
우리는 나날이 새날을 살아간다. 어제 같은 오늘 없고, 오늘 같은 내일은 절대로 오지 않는 법칙 위에 살고 있다. 같아도 같지 않음 속에서 살아가는 게 오늘이기 때문이다. 동장군 봄 시샘하듯 칼바람을 일으킨다한들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꽃샘추위로 부르며 애교서린 봄을 고대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봄볕이다. 추한 게 드러나고 억눌린 대지가 살을 틔워 제 모습을 회복하려하지만, 지난해 같은 올해가 결코 아니라는 듯 거리는 온통 쓰레기투성이다. 오늘도 팔 백 여대가 넘는 쓰레기차들이 청라 매립지를 향해 꽁무니를 내리고, 휴일을 맞아 이른 상춘객들이 골목과 구석 그리고 길바닥에 쓰레기를 내다 꽂는 현실 앞에 선진문화를 꿈꾸는 시민의 가슴은 여지없이 냉골이 된다. 문화적 삶을 지향하면서 비문화적 행위를 자행하는 현실 속에서 내일의 오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외형상으로 인천 남구가 주민의 삶의 질과 만족도가 높게 나왔다손 치더라도, 어차피 인천이라는 땅의 일부이고 그나마 나머지 아홉 개의 기초 자치단체도 관광을 명분으로 인천의 이름을 드높인 걸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좀 더 깊고 실천적인 시민문화 창출의 재천명은 마땅한 과제가 된다.
교토(京都) 아다시노 넨부츠지(化野 念佛寺)에서는 어느 누구도 뭔가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8천 여구 풍장(風葬)의 주인공들이 무명으로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느 틈엔가 뭔가를 슬그머니 버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띄고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 화끈거리는 그 부끄러움은 내 집, 우리 동네, 인천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인천도 다를 바 없이, 아다시노 넨부츠지에 버금가는 슬픔을 품은 곳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참수지로(제물진두), 일제 강점기엔 민족 말살지로, 한국전쟁 전후엔 보도연맹 참살 현장(월미도, 중구청, 수문통)으로 억울하게 돌아간 분들이 많다. 슬픈 지역사의 토대 위에 건설된 만큼, 동네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 솔선해야 마땅하다. 다가올 봄은 예전의 그 봄이 아니므로 새로운 마음가짐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