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
1994년 10월 중순께 시작돼 매주 금요일 공중파로 방영된 ‘포청천’은 시청률 25%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TV 앞에 끌어 모았다. 추석 명절 제사상을 향해 흩어졌다가 모이는, 전국 귀성객의 절반 가까이 시청했던 포청천의 인기는 그만큼 대단했었다. 국내에 그치지 않고 친구가 살고 있는 태국에 가서도 포청천을 보았고, 중국 상하이에서도 넋을 잃고 시청하는 대열에 앉아 물만두 ‘쉐이자오’를 먹기도 했었다. 베테랑 성우 노민 선생의 걸걸한 굴곡어 더빙과 대만 배우 금초군의 조합이 빚어낸 연기도 압권이었지만, 화면을 집중하는 다국적 시청자들의 눈빛은 예사로움을 넘어 열병을 앓는 듯해 보였다. 미.소 양대 헤게모니 붕괴에 따른 국제사회 지각변동에 대처하고 있는 시점과 맞물린 상황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성장과정에서 고질적으로 속출했던 사회적 비리를 묵과해야 했던 소시민들에게 정의의 불씨를 던져줬다는 쪽에 드라마의 무게감은 쏠렸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인사청문회 대상자들의 자격논란이 연일 회자되고 있다. 위장전입은 기본이고 부동산의혹, 논문표절, 자녀 이중국적, 스폰서의혹, 거짓말, 뇌물수수와 투기의혹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흑심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불량스럽기 짝이 없는 고위인사들이 주 내용이었다. “윗물이 그렇게 흘러가는데, 어떻게 아랫물이 맑길 바라느냐”는 볼멘소리들이 사회 전반에 지둥소리처럼 들리고 있다. 천둥소리는 없어도 정화수 같은 보슬비라도 쏟아져야 하지 않느냐는 듯, 시민들의 눈길은 자주 허공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런 와중에 인천 위정자들의 불편한 소식은 눅진 귓밥에 덧대기 씌우듯 고막을 틀어막아버렸다. 모 국회의원을 비롯해 모 시의원의 무소불위적 행태는 위정자로서의 자질과 양심은 물론이고 오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확대재생산적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수 억, 수 천 만원의 뭉칫돈이 오고가는 것이나, 안식구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시민의 혈세인 의회업무추진비를 쓰게끔 하는 것 등은, 어느 것 하나 볼썽사나운 짓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이라 일컫는 자는, 타의 모범은 물론 修己治人(수기치인)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朝鮮朝淸白吏誌(조선조청백리지)를 보면, 청렴 근검 도덕성 경훈 인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백성에 대한 봉사정신 등 개인생활철학을 실천해왔던 공직자를 뽑아 청백리로 삼아 후대의 사표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 번 들어도 타당한 말이고 의당 그렇게 해야 위정자의 처신에도 걸맞는 아름다운 기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굳이 2011년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지방의회의원 행동강령을 맞삼지 않아도 될 훌륭한 교훈이 있음에도 眞我(진아)를 포기하려는 이유는 도대체 무얼까? 세종대왕 치세에 조선 최대의 청백리가 발굴 천거됐다는 점과 박근혜 정부에서 드러나는 반사회적 위정자들의 고위직 임명 행렬과의 연관성은 어떤 상관관계일까? 아울러 한 다리 건너면 가족에 준하는 관계였을, 인천 사회 지도층의 무지함을 속절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인천시민의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20년이 지나도 내 마음 속 포청천은 이마에 초승달이 각인된 채, 개 작두며 호랑이 작두를 냅다 죄인 앞에 내놓고 있다. 서부의 보안관 존 웨인, 존스톤 맥컬리의 쾌걸 조로, 허균의 홍길동, 홍명희의 임꺽정, 장길산이 오늘따라 보름달처럼 크게 보인다. 그러나 허상으로 그려낸 정의는 한낱 꿈일 뿐.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말마따나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정치적 결정은, 상호간의 거울 역할을 통해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이 무엇보다 인천 사회 전체로 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