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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동 동화마을의 원력(原力)

濟 雲 堂 2014. 4. 4. 17:36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또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곳을 고향이라 한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몇 가지 붙임 말 가운데, 필자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인천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천 정체성 논란의 진원지이며 해결방안에 대한 궁극이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로 봤기에 더욱 절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4월 칼럼에 ‘토박이’라는 진부한 개념을 ‘터잡이’로 전환해야 할 때임을 힘주어 말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인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환기시켜야 보겠다는 시대적 요구의 대안 차원이었다. 동어 반복적이지만 구태의 수면에 물수제비 파문을 일으키듯 남루한 화두를 던진 이유는 세간에 ‘대박’ 터뜨렸다는 동화마을과 그 축제에서 소시민적 혼돈과 역사의식의 부재가 우려스러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 수군만호를 배치했던 성창포 주변은 제물진 또는 제물량이 일찍이 자리 잡고 있어, 오늘날의 송월동 북성동의 역사지리적 환경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인천의 개항 전야와 같던 시기인 임오군란 때에는 일본공사 화방의질의 탈출을 기념해 <화방공사일행조난지비>가 화방정이라는 이름하에 버젓이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일제가 1920년에 웃터골 운동장(제물포고교)을 조성하기 전에 바다를 가까이 조망할 수 있으며 낮게 구릉진 이 일대에서 자주 운동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한편, 파울 바우만 별장(자유유치원)과 파울 쉬르바움 주택(섭리수녀원)이 독일인 거주지를 형성해 한국근대사의 이국적 현장이었음을 직접 증거하고 있다. 여하 간에, 일제가 강점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후, 이 동네는 일본인 건축업자와 인천부청의 계획에 의해 비슷한 모양의 임대주택들이 들어서는 전형적인 일본인 거주지로 바뀌게 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들이 오밀조밀 낙후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이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지난했던 삶의 질적 변화를 누구보다 깊이 갈구했던 공간이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송월동 북성동 일대에 불어 닥친 근대의 물결은 인천전기주식회사(남경포브 아파트), 애경사, 조일양조주식회사(송월아파트), 태전석감제조소(비누공장), 일본제분(대한제분), 조선목재(대성목재) 등을 빚어냈고 해방과 함께 한국인들이 이 일대에 정주하게 된다. 북성(北城)을 짓고 이양선과 외세를 견제했던 자주적 공간을 기억하고자 ‘북성고지(유실됨)’ 표지석을 세웠던 1세대 향토사학자 어른들의 노고가 덧그림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송월동 북성동의 원력이 이러할 진데, 난 데 없이 출현한 서양 동화 일색의 그림들이 마을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건 혼돈의 수위를 넘치게 만든다. 이미, 어차피 만들어진 공간을 어찌해 보겠다는 의도가 아니기에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건만, 어디를 봐도 동네 이야기는 없고 죄다 먼 나라의 환영들뿐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반세기 넘도록 아동문학과 동시의 씨앗을 전국에 뿌린 현존 원로 작가들은 본인의 마을에서 애초 무시되었고, 관광과 상혼, 지자체의 무지한 충정이 연출해낸 환상들이 문화의 혈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인천의 역사 문화적 동맥경화 현상을 부채질하듯 탄성을 지르고 사진으로 담아내는 여린 동심에 문화적 창의성과 역사의 고귀함이 재생될 수 있을까 고민스럽다. 지면을 빌어 지자체와 그와 관련된 분들께 진심으로 고언하자면, 과거로부터 비롯된 현재의 현상을 읽지 못하고 미래의 이상을 무책임하게 제시하면, 오류의 우물을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쁘게 치장된 채 폐쇄돼 생명력을 상실한 송월동의 우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