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두꺼비의 변
대대적으로 집수리를 했다. 간난신고 끝에 겨우 정리가 되었다. 1936년도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 건물을 손본다는 게 어려울 거라 예상했지만, 그 이상의 것들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난관이었고 난제였던 것은 집수리를 하는 데에 나름의 원칙을 정하고 지키려 했다는 점이다. 일단, 재활용할 것과 버릴 것의 구분, 새로 설비하거나 보강할 부분에 대해서는 비용부담을 갖더라고 강행하자는 생각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원칙은 시작부터 흔들렸다. 재활용과 버릴 것에 대한 기준이 애매했고 일일이 의미부연 하다 보니 죄다 버려서는 안 될 것들 투성이었다.
열 평 남짓한 땅뙈기에 삼 층 목조, 게다가 주워 모으다시피 한 물건과 책들이 빼곡 들어찬 공간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어 보였다. 검여 유희강 선생 생가를 허물면서 버려진 기왓장과 닳아빠진 표구, 노다 장유 주식회사 돌 문설주, 완공 이전 가톨릭 회관 조감도, 시장에서 30년 넘게 사용하다가 방치한 생선 할머니들의 칼은 물론, 군대에서 어렵사리 철필 긁으며 창간 제작한 ‘포성’이란 잡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배인 제각각의 의미소들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백 여 포대의 쓰레기가 두 차례에 걸쳐 건축폐기물 차에 실려 가는 동안에도 죽 끓듯 한 마음의 요동은 멈추질 않았다.
뙤약볕 아래 40일은 마치 ‘광야의 유혹’처럼 현실감을 우롱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아예 전문 인력에게 모두 맡겨 속 편히 부채질이나 하고 있을 것을, 갓 제대한 아들 놈 잡는다고 볼멘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십대 때 집지어본 경험을 들춰내지 않았던들 물론 막일잡부 노릇이었지만, 막상 샅바를 잡고 보니 오기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내 방식대로 삶의 근거지를 마련해 보겠다는 모종의 책임감이 재단장의 총체적 무게감으로 다가섰다.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시행됐던 반문화적이고 무자비한 주택 재개발 방식을 직접 해결해 보겠다는 이유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됐으며 적은 비용에 정돈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자위자족의 수준에 머물지만, 옛것을 살리고 나무 고유의 질감과 살아온 공간의 연혁을 엿보게 했다는 점에서 지그시 방점을 찍어본다.
오래된 도심. 특히, 개항장 일대는 근대시대에 뿌리내린 집들이 여전히 많다. 초가나 기와를 얹힌 전통 가옥은 아니지만 일본, 중국, 서구의 양식이 큰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오물쪼물 덧대었지만 전체적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 전역 근대 개항 도시의 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인천 개항장만큼 이국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인천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면 구닥다리 인천이란 도시를 새롭게 벼리기에 너무도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이다. 요행스러운 것은 개항장 일대에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아닐지라도 건물의 큰 틀을 훼손하지 않고 옛 모습을 살려 유용한 공간으로 만드는 자발적 움직임들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선린동의 ‘낙타와 사막’ 관동의 ‘Pot-R’ 경동의 ‘싸리재’ 중앙동의 도자기 카페 ‘락원요’ 금곡동의 ‘시 다락방’ 등은 건물주의 근대문화에 대한 지각과 양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래된 집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의 공통적인 대답은 ‘만족’이었다. 문화적으로, 나아가 친환경적이며 인문주의적 재개발 방식에 따른 상업적 이윤은 ‘덤’으로 찾아 들었다. 개인의 취향과 문화적 양식이 배제된 신자본주의적 사고로 포장된 그 간의 주택 재개발 방식의 폐해는 이웃의 단절과 문화적 불통 그리고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을 끄트머리에서 다가올 겨울의 냉혹함을 목도하는 현실에서 화롯불 같은 낭보가 분명하다. 이웃과 오순도순 집들이하며 벽돌장처럼 굳은 인절미를 군불에 노근노근 녹여먹는 즐거움이 다가오길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