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월미도, 그 애련한 역사의 속살

濟 雲 堂 2013. 6. 4. 22:51

 

 

여전히 얼굴이 시리고 목 언저리에 스산함이 감돈다. 가을은 한 뼘 겨울은 두 팔, 봄은 손바닥만큼... 그리하여 더울 일만 남았는가. 긴 겨울에 긴 여름이라는 이색 체험 공간이 되어버린 인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6월의 길섶에 쥐똥나무가 버석거리며 초록을 지키고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냉기 흐르는 불편함에 출근길 옷차림이 생경스럽기까지 하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너머 해무 사이로 월미도가 나른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월미도가 달 꼬리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 주장하지만, 월미도는 달과의 연관성이라고는 김정호의 청구도에 ‘월성(月星)’이란 표기 외에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었다. 어을(於乙)이란 표기조차 얼(孼.서자)를 늘려서 ‘어을미도’라고 부르게 된 것임을 알았을 땐,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라는 의문이 골머리를 들쑤신다. 자식은 자식인데 본부인이 아닌 뱃속을 통해 낳은 자식을 얼(孼) 또는 서얼(庶孼)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단어와 월미도와의 연관성에는 별로 감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면 맷돌은 있으되 손잡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뜬금없이 만들어진 이름이었을까? 다양한 해석 가운데 ‘어을’을 ‘어르다’라는 의미와 결부시킨 해석이 눈에 띈다. 원래 ‘어른’은 사랑을 나눠 본 사람, 즉 성행위를 해 본 경험자를 지칭하는 우리말인데, 물을 의미하는 ‘미(水)’와 합체되어 섬의 이름으로 되었다 하니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상황을 유추해봄직한 게 월미도 앞 바다에 있는 작약도이다. 물을 치받는 섬이라 해서 물치도(勿淄島)라 표기하지만, 이마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억지춘향처럼 갖다 붙여진 한자말이다. 여하튼 월미도와 작약도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한강, 임진강, 강화 김포 해협에 이르는 인천 앞 바다의 자연환경과 매우 긴밀한 역학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라 하겠다.

 

인천을 비롯해 수도권 2천만 인구의 사랑을 받으며 변모를 거듭해 온 월미도는 오늘도 변화를 꿈꾸고 있다. 이쯤에서 인천사람이라면 월미도에 대한 각별함을 뛰어넘어 유별난 사랑으로 존재감을 높여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다. 눈으로 본다고 다 보이는 것도, 만진다고 다 만져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온 몸으로 체득하고 그 역사의 속살을 들쳐보지 않으면 깊은 우물의 시원함을 경험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월미도에 임금의 강화도 도피를 위한 행궁이 설치됐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른바 ‘월미행궁’인데 인조임금의 삼배구곡(三拜九曲) 굴욕사건을 계기로 외침 시 임시거처로 마련된 것이 그 배경이다. 조선시대는 전략적 중요 거점 섬 이외에는 섬 자체를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했기 때문에 제한된 인력을 제외하고는 군마와 가축의 방목, 삼림 등을 키우는 공간일 따름이었다. 그랬던 월미도가 내외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인천 개항 사건의 전후 무렵이었다. ‘내외’적이란 말이 알려주듯이 프랑스 함대가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 아일랜드’라 불렀으며, 서구열강의 이양선(異樣船)들이 해도제작과 상호무역을 요구하며 월미도 앞바다에 출현하고 조선정부가 포대를 설치하고부터는 근대시대의 서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여하 간에, 지면의 짧음을 무릅쓰고 월미도의 지난 이력들을 대략 간추려보면 다음의 큰 사건과 내용들이 그 속살에 배겨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및 연대 무순으로 정리해보면, 일본에 의해 무선송신국, 애탕신사(愛宕神社), 조탕(潮湯), 해변호텔, 캠핑장, 사슴목장, 임해학교(청소년 해변학교), 풀장, 해수욕장, 목조철도교, 미역양식장, 등대 등이 세워졌다. 러시아는 저탄창고, 미국은 스탠다드 석유주식회사의 석유창고가 설치돼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월미도 내에 있던 러시아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목조철도가 개설됐던 것이 토사의 쌓임과 선박의 접안 불편으로 인해 급기야 도크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결국 돌로 지은 방죽이 생겨나게 되어 영원히 섬의 모습을 상실한 채 ‘섬 아닌 섬’이 돼버린 게 1920년대의 일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주둔지로, 해역사로, 드디어 2001년에는 오롯이 인천시민의 자유로운 발길을 허락했던 섬. 급물살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대의 상처와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뜻 모를 이름과 상업자본주의의 미명으로 변해가는 월미도였던 것은 아닐까. 인천 땅 끝자락에서 여전히 동면을 풀지 않는 고독한 짐승인 채로.

<미가엘복지관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