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나의 살던...,’ 똥 바다

濟 雲 堂 2013. 5. 19. 14:09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고향 관련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을 읊조릴 때마다 모종의 자괴감이 생겨난다. 친일 행위에 적극적 참여를 넘어 동화하려고 했던 사람이 작곡했다는 점도 있지만, 인천 거주민 대다수가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속에 ‘고향’ 이미지로 그려내는 입체적 공간이 인천이 아니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고향은 지리적 시원성에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이 농축 저장된 현재 너머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를 존재케 하는 출처임과 동시에 현재를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 고향에 대한 정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향에 대한 둔중한 향수를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인생의 버팀목이자 떠도는 영혼의 안식처로 대변되는 단어가 바로 고향이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다문화 공존의 시대, 평화와 상생 협력의 시대에 입체적으로 뇌까리는 고향에 대한 수구적인 행태들이 현재적 공간성에 지대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사회적인 일이라 하겠다.

 

요즘 불어 닥친 대통령 선거 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지성과 이성적 판단을 요청하기 보다는 고향내지는 각종 연고를 운운해 가며 감성을 자극하는 맹세들이 바람 앞의 깃발처럼 여전히 요란스럽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과거에 치렀던 대선처럼 폭구에서 퍼붓듯이 일방적 폭언을 일삼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듯 생산적 변화에 대한 호평은 돈오돈수처럼 더디게 깨닫는다하더라도 한층 진일보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값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천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성적 고향임을 주장하면서, 제 2의 고향이라 명하면서도 애린하여 다가서는 자세들을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

 

근대 개항 당시 인천, 즉 협의적인 의미로 제물포 포구 일대가 인천으로 불려졌을 때, 인천의 인구는 일만 여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에 불과 했었다. 그러나 일감의 증가와 새문물의 도래, 전국 각지에서 파생된 생계에 위협적인 사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신천지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구적인 사상가들에 있어서는 기회의 땅이었던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근대 인천의 배내정신을 굳이 정의하자면 ‘포용과 희망의 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포괄적 주체가 바로 인천사람이요 ‘인천사람이 된’ 선배들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공간 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인천에 정박하지 않은 21세기 신 인천인들을 위해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제논은 역설한다. “내가 쏜 화살은 정지해 있을 뿐이다”. 필자는 재 역설한다. “따라서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고향살이에 대한 연장인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을 무작정 따라 불렀던 어린시절에는 이 노래 작곡자가 반민족행위자였다는 것을 몰랐다. ‘꽃 피는 산골’ 쯤이 머릿속에 맴돌 무렵에는 대문만 열었다 하면 갯바람 진하게 실려 오는 바닷가 마을. 때때로 똥 바다 원목 사이로 내 또래 아이가 빠져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오기도 했었다. ‘무궁화 꽃 살구 꽃’ 철들 무렵에는 자신의 재산 일부를 떼어내 삭막한 만국공원에 ‘연오정’이니, ‘석정루’를 희사한 의로운 인천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타향살이가 고향살이의 연장이라는 것을 앞서 말했다. 인천의 공기로 숨을 쉬고 인천을 육신의 텃밭으로 삼아 미래로, 기회가 넘치는 신세기로 내딛으려는 ‘인천사람이 된’ 시민들은 오늘도 인천에 대한 사랑가를 계속 불러야 할 것이다.

2007.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