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에 바란다.
계사년에 바란다.
손때 절절이 묻은 어처구니를 보면 마음이 누그러진다. 게다가 모난 데 없이 매끄럽게 닳은 끄트머리를 만졌을 땐, 날 세우며 살아온 일상들이 시나브로 반추된다. 새해 느낌은 그렇게 다가왔다. 옛것의 온후함이 간절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이와 주름 이외에 반성할 기회를 보너스로 받게 된 계사년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진일보를 쫓는 풍조가 만연한 현대의 일상은 늘 모종의 압박감에 시달려 살게 마련이다. 우람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거리를 채워나갈 때마다 마음 한 곁이 스산해지고, 충족감보다는 그 그늘이 만들어 놓은 빙토에 발을 헛디딜까 우려가 앞서고 있다. 동전 던지기처럼 호불호를 점치듯 운에 맡겨버리는 개발논리가 과연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권력을 잡았다 해서 추진하는 사업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통해 깨닫는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았다. 좀 더 사려 깊은 논의과정은 없을까? 뭐, 이런 게 민주주의인데, 정작 우리 사회의 정체감은 불나방 같은 독단적 처방과 과시, 과욕을 남발한 부도수표처럼 허투른 결과물 투성인 현실이 뜨악하다.
약관 무렵에 품었던 생각이 수정돼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미륵신앙 또는 메시아 신앙으로 대변할 수 있는 상황의 절박성은 늘 존재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사람의 역할은 다 해야 하지 않나 라는 쪽에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신라의 의결기구였던 ‘화백제도’의 상징성은 오늘날에도 많은 감동을 부여하고 있다. 특정 사안을 두고 절대치를 이룰 때까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21세기의 속도전에 비춰 절름발이 행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폐해결과를 보면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재정 부담 등으로 겉잡을 수 없는 파탄지경까지 몰고 간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에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대소를 막론하고 실권자가 바뀌면,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해내는 일련의 사안들이 딜레마에 빠져 허둥대는 모습으로 곧잘 눈에 띈다. 필자의 정체성 전부를 담보하는 인천이라는 한 뙈기 땅에서 벌어지는 행태만을 보더라도 편 가르기와 제 식구 챙기기, 권력에 도모하여 실속 챙기기 등에 홍채가 돌아가, 길을 놓지는 경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딱 짚어서 말할 것 없이 총체적 불신 국면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꼭짓점을 찍는다.
필자의 작업장에 선친이 물려주신 맷돌에는 어처구니가 없다. 손잡이를 잃은 까닭에 늘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존재의 상실감은 부재의 허탈에 고삐를 쥐어주어 현재를 채찍질하게 만든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꼭두쇠 노릇에서 손을 놓기 시작했고 어처구니 역할을 자청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빌미를 제공한 것은 요코하마 시민들이었다. <미나토 미라이21> 즉 요코하마 재개발 과정을 여과 없이 설명했던 무라하시 교수에 대한 감동이 속절없는 부끄러움을 줬기 때문이다. 시민과 학계, 행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십년 넘게 논의하고 합의를 본 끝에 추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우리의 훌륭한 전통이 남의 몸에서 꽃을 피운다는 게 여간 자존심 상하는 게 아니었다.
계사년 달력도 어느새 첫 갈피를 접고 있다. 그러나 <설>이 다가온다. 한 해의 첫날의 의미가 무거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설날은 그렇게 다가올 것이며 어처구니를 잃은 자리에 희망의 나무가 자라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