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뽕
-섞이며 완성되어 가는 인천, 그 속살 이야기-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개항장역사문화연구소 대표 이 종 복
프롤로그
‘먹을거리’와 ‘먹거리’에 대한 표준말 논쟁은 ‘둘 다’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으로 싱겁게 결론이 났다. 국립 국어원이 제시한 표준말 대열에 이 두 말이 허용됨에 따라, 2011년 여름 이전만 해도 ‘먹거리’를 버젓이 써 온 각종 광고지와 사용자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했던 ‘먹을거리’ 옹호론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쭈뼛쭈뼛 불퉁해진 입술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 음식점엘 들어갔을 때, ‘자장면’이 표준말이 됐다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자장면’ 달라고 주문하는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느닷없이 ‘짜장면 곱빼기’라고 더 큰 소리로 주문하는 장면들이 반사적으로 더 늘어났다는 점이 요즘 표준말 씀씀이의 새로운 풍경이다.
수십 년간, 어쩌면 백여 년간 ‘짜장면’ 발성연습을 해온 중국식당이라는 무대에서 난데없이 ‘자장면’으로 불러줄 것을 강요당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오랜 관습과 추억 그리고 즐거운 식사 시간에 대한 호방한 외침을 옭아매려는 처사에 가슴 한쪽에 반기를 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짜장면’과 ‘자장면’ 논란은 말의 합리성과 실용성에 바탕을 둔 생활언어의 승기로 받아드린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언제고 그러한 논쟁이 다시 서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정부의 지침을 기꺼이 따르던 대다수 착한 백성들은 씁쓸한 입맛을 맹물로 다셔내야만 했던 구태적인 사례가 되었다. 어쨌든 백성 알기를 밴댕이나 박대의 내장쯤으로 여기는 꼴통 지식인 내지는 권력의 나팔수 집단에 의해서 자행되는 부조리는 우리 일상사에 언제든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점과 이런 일들은 늘 벌어질 수도 있는 해프닝 같은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반복적인 실수를 통해서 성숙해지고 그 생채기 위에 덧옷을 새롭게 걸쳐 입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껍질을 까놓고 보면 본체는 어디까지나 원질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경험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원칙을 지키려는 초발심이 양심의 바탕화면에서 지속적으로 켜져 있기를 바라는 의지가 인간의 역사관에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역사관을 가졌다고 통렬한 비판을 받을지 모르나, 미래 사회 역시 과거 역사와 마찬가지로 감춰진 것은 까발려지고 허투루 드러난 것은 다시 감춰지게 되는 부침의 윤회성을 그대로 담보하게 될 것이라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엉킨 실타래를 끈기 있게 풀어내려는 의지의 소산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한, 역사는 진보의 성품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오히려 타당하다. 본 글은 해프닝과 부침 그리고 판세로 연결되는 문화의 기둥들 사이에 이끼처럼 자라나는 ‘틈’ 이미지를 확대해 글로써 희화화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역사를 말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풍속과 문화였다고 서슴지 않게 말할 부분도 생길 것이며, 또한 묵은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보되 너그럽게 이해하고 미래를 성실히 책임지려는 노력들이 통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도 잇따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참된 목적은 인천을 가슴에 품었느냐에 대한 자아 질문과 함께 인천의 가슴을 어떻게 열어젖힐 것인가 하는 인문학적 실천의 한 방편을 제시하고자 함에 있다.
근대 개항장 인천에서 벌어진 짬뽕 같은 사건. 하나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인천은, 문명의 바다 최 접점에 서서 근대의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낸 지역이었다. 인천의 근대 개항 사건은 세계사적 측면에서 전근대와 서구 자본주의와의 충돌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종교를 위시해 교육, 의료, 자선 사업 등의 유입은 전근대적이었던 사회 조류를 일거에 술렁이게 만들었고 서구 양행의 진출은 서양 세계의 자본력과 군사적 힘의 크기를 가늠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국적의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답동 언덕바지에 세운 성바오로 성당(답동성당)과 영국의 성공회 코르프 주교와 미국계 의사 엘리 바 랜디스가 투합해 세운 성공회 성당과 영국병원은 외국인 주도하에 세워진 인천의 대표적인 종교 시설이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 감리회에 속한 존스 목사가 내리 예배당를 설립해 운영해 왔고, 인천의 개항 시기에 맞춰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가 개항지 곳곳에 세워져 인천은 마치 외래 종교의 메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본인이 세운 종교 시설은 기독교회를 포함해 열여섯 곳에 이르고 중국인이 세운 중화기독교회와 도교식 사원 의선당은 선린동에, 앞서 말했던 서구 종교를 포함한 스무 곳이 넘는 종교시설이 개항장 일대에 포진해 있던 정황을 보더라도 인천은 여타의 개항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파리외방선교회가 선교의 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은 고아원 운영이었다. 영국 성공회는 의료사업과 일본인을 위한 영어 학교를 운영했고, 일본의 불교 가운데 동본원사는 일본인 자녀교육을 전교의 방편으로 삼던 교파였다. 한편 미국 감리회 내리 예배당은 서구식 교육 체제를 인천에 처음으로 도입해 조선인 자녀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펴기도 했었다. 해성보육원과 인천항박문학교가 파리외방선교회의 씨앗으로 출발했다면, 인천 최초로 서양 의술을 선보인 영국병원(일명 랜디스 병원 또는 약대인 병원)은 성공회가,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교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오늘날 신흥초등학교로 변모하게 만든 동본원사 등은 그 실 예라고 하겠다.
개항 당시의 인천 지리는, 이른바 원인천 지역이라 불리는 개항장 일대는 현재의 중구와 동구의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넓이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지계 칠천 여 평, 청국지계 팔천 여 평, 각국 공동지계 십사만 여 평이라는 공식 너비를 포함해 인근에 있던 내리, 외리, 용리, 율목리, 우각리, 금곡리, 여의리, 화평리, 신화수리 등이었다. 오늘날 내동, 경동, 용동, 율목동, 금창동, 숭의동, 화평동 등으로 불리어지는 지역인데, 지도를 놓고 보면 말 그대로 개항장 주변을 띠처럼 두르고 있지만 듬성듬성 민가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촌락의 구조로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스무 곳이 넘는 외래 종교단체가 기를 쓰고 존재했었다는 사실로 보아 종교적 포교의미 이외에 다른 배수진이 있었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근대 개항장 인천에서 벌어진 짬뽕 같은 사건. 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개항장인 부산의 경우 조선중기부터 대 일본 무역의 전진기지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용두산 공원 아래턱에 ‘왜관’이라는 지명을 보더라도 일찍이 일본과의 통제무역을 시행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개항의 시대적 배경에 관한 부분이다. 개항은 개항인데 ‘근대’의 개항이라는 단서를 붙였는데, 인천의 경우 고대 백제시대로 일컬어지던 3세기경 중국의 남송과 교역을 터 ‘능허대’의 역사적 실존과 실무역의 기틀이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점에서 딱히 구분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인천의 개항 사건은 시기를 분명히 구분하여 ‘고대 개항’과 ‘근대 개항’으로 나뉘어져야 마땅하다는 이유에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근대시기 인천의 개항 사건은 총체적인 면에서 개항의 몸살을 적극적으로 앓았던 공간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점이다. 개항의 공포로 인해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대한 서구 세력의 관심은 지대함을 넘어 매우 적극적인 행동으로 몰아붙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특히 부산, 원산에 이어 가장 늦게 개항을 하게 된 인천에 대한 관심이 그러하였다. 지정학적으로 수도 한양과 인접해 있다는 사실과 대 중국과의 지리적 접근성이 여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수월했다는 점이 인천을 선호하게 된 이유로 둘 수 있다. 개항과 함께 조계지 설정을 논함에 있어서 서구 양행의 입점과 각국 정부의 업무 파견 기구인 영사관의 설치가 실제로 설립돼 운영된 곳이 인천이 유일하기 때문에 더 큰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규모면에서 부산과 원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인천의 개항 소식은 전국적으로 퍼져 작은 어촌 마을의 분위기를 상쇄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일감을 찾아 유입된 인구는 단박에 늘어났으며 인천 행정을 담당했던 문학도호부가 늘어난 업무와 개항장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개항지 인근으로 확장 이전한 것만을 보더라도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임오군란과 잦은 흉년을 거치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인천 개항장으로 쏠리게 되었음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겨진다. 인천은 기전지방으로써 수도 한양의 위성지로 분류되지만 개항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유민들에 의해서 전국규모의 집단적 혼향지(混鄕地)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인천 거주 조선인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부산에서 이주해온 객주들이었다. 부산 개항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적 수완의 발판을 마련한 객주들이 인천으로 눈을 돌리게 된 점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하겠다. 한양의 객주와 황해도(개성) 객주 그리고 인천 객주 등이 주요 상권의 구성원이 되고 항구를 중심으로 투입된 인력들은 모꾼청의 관리에 의해 각 지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환경의 변화는 급류를 타기 마련이었다. 급격한 인구의 유입에 따라 지방색은 여실히 드러났고 몸에 밴 습속 또한 인천이라는 새로운 현장 속으로 녹아들게 마련이었다. 한반도 지형을 전체 그림으로 살펴보면 인근 중국과 일본에 비해 작은 강역을 가졌지만 지방의 고유한 특색이 깊숙이 내재돼 있는 독특한 구조로 형성되어 왔었다. 사용하는 말씨가 그랬고 음식에 대한 미감과 삶의 정서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하 간에 각 지방의 특색을 지닌 사람들의 유입에 따른 인천만의 인문학적 지형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음은 분명했다. 이에 따라 먹을거리에 대한 변화, 주거문화 그리고 외래문화 등의 섞임 현상은 인천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 잡는 데에 한 몫을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음식은 사람의 생존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지만, 종교적 행위에 바탕을 둔 일절의 의식과 만났을 때에는 다양한 격식과 의미 구현의 신심을 높이기 위해서 특별한 과정(방법)을 거치게 마련이다.
인천의 대표적 음식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음식들 가운데, 정작 인천을 자생지로 지칭할 수 있는 음식들은 불과 몇 가지에 불과했다. 오히려 음식의 분류에서 벗어나 지역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생선 종류와 소금이 그 것이었다. 이런 바탕 위에 조리할 수 있는 음식 층은 엷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반면, 장(醬)문화로 대표되는 지방 음식들의 도래는 인천의 음식 층을 넓게 만들어 지방의 특식들을 인천에 정착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특히 된장, 간장, 젓갈, 고추장 등을 이용한 음식들과 산채 및 소채류를 이용한 다양한 찬거리와 외국 음식의 등장은 인천에서 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음식문화에 대한 풍속과 내용은 다른 장에서 별도로 다루겠지만, 인천으로 유입된 인구 구성은 타지방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충청도를 위시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다. 개항장 인천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외지 인구의 유입은 인천의 환경을 더욱 인천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근대 개항장 인천에서 벌어진 짬뽕 같은 사건. 셋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나오는 우리의 주거문화는 유교사상과 풍수사상을 좀 더 현실감 있는 실제적 생활 구조로 기술, 전개했다는 데에 깊은 의의가 있다. 바꿔 말하면 처지에 맞고 환경에 맞는 생활공간을 창출해 건강한 삶을 영위한다는 게 주요 골자이다. 그러나 인천의 경우 급격한 인구의 유입에 따른 주택문제와 외래 건축물 설립 등의 영향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인의 주거형태는 더욱 소규모로 바뀌었고 기존의 전통 방식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든 집이 아니라 빠른 속도와 구하기 쉬운 재료에 의존해 만들어져 협소하고 허름하여 볼품이 없었다. 반면, 일본과 청, 독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건축물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지어 상대적인 위압감과 함께 국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상반된 주택과 건축물의 극명한 구조가 주는 위상은 개항 도시 인천에서 벌어지는 일반화된 현상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천만의 특색으로 자리 잡는 결과가 되었다.
일본과 청을 비롯하여 서구 강대국들이 쪼개고 나눈 조계지를 경계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갈 때, 조계지 내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턱없는 보상을 받아 이주했으며 도로의 정비는 물론이고 닦이지도 않은 들이나 바닷가 주변과 구릉 등에 거처를 마련하는 상황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배다리 금창동 일대와 수도국산이라 일컬어지는 지역이 그러하였다. 이렇게 이주하게 된 이유에 대해 주변 나라의 역사를 포함해 소급해서 설명해 보면 다음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중화주의를 주창했던 중국이 1840년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홍콩을 위시한 해변 도시들의 개항을 허용하게 되는데, 단순히 전쟁의 패배보다는 동서 문화의 이질적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문화적 충돌에 의한 잠식이라는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중국 상해가 개항을 하자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서유럽 국가가 조계지를 설정하여 정치적, 상업적 활동을 활발히 주도할 무렵 후발주자로 일본이 상해에 발을 들여 놓는데, 당시 국력의 비교 우위를 점했던 국가들로부터 일본은 미개하고 일천한 상업 행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낮임에도 ‘훈도시’만을 차고 거리를 활보하였고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일본 전통복장을 하고 다님에 따라 조계지 내에서의 풍기문란 문제가 제기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조계지를 점한 국가의 회칙이 설정 공포되어 저지를 받게 되었다. 신동공사(紳董公司)는 그러한 조직의 한자식 표현으로서 일명 ‘조계지 위원회’ 또는 ‘조계지 의회’라는 의미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전거로 해서 1883년 인천 개항 당시는 좀 더 치밀한 전략과 방법 그리고 구체적인 방향성이 잡힌 상태에서 신동공사 조직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신동공사의 수칙 가운데, 주목할 것은 과거의 전례를 세련되게 다듬어 구체화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계지내에서는 벽돌과 돌(화강석)을 이용해 건축을 할 것. 경찰서와 재판소를 설치해 분쟁을 조정할 것. 풍기 문란에 관련되어(특히 일본) 복장을 갖춰 입을 것 등을 명시해 치외법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는 점이다. 앞서 전거했던 개항장의 위상은 조계지내와 바깥이 명확히 구분돼 있어 건축물의 다름이 큰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였다. <이하 생략>
참고자료: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2002
「간추린 인천사」. 오정원 외. 인천학연구소. 1999
「인천중구의 과거와 현재」중구청. 2006
「인천부사」. 인천부. 1933
「개항과 양관역정」최성연. 1957
「개항장 근대건축 기행」황금가지. 2002
「인천근대건축」손장원. 2006
「인천석금」(윤문본. 해반)고일. 1999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 연구」손정목. 1984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A. Henry savage-Landor(신복룡 역) 1999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Madame C Vautier(김상희 역)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