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여름 한담(閒談)

濟 雲 堂 2010. 7. 28. 13:46

 폭우가 한 차례 지나고 난 뒤 하늘을 보니 먹빛 구름들이 자욱하게 아파트를 누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비지땀이 등골을 따라 흘렀고, 열기를 미처 거두지 못한 밤공기는 아스팔트를 더욱 거뭇하게 만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새벽시간을 가르는 트럭들이 아파트를 가로질러 사라질 때마다 맹꽁이 울음소리도 따라 멈추는 묘한 리듬에 귀 기울이다가 부지불식간 아침이 온 것에 소스라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도 가끔 생겼다. 비단 필자만 그랬을까만, 짐을 어깨에 짊어지듯 무겁게 출근하는 아침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여름은 과연 여름이고 장마철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바라보았던 14층 높이의 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아침, 불현듯 시공을 넘어선 필자의 현재 위치에 대한 파노라마 같은 영상이 동공 밖으로 쏟아지고 있다. 백 여 년 전에 이 자리는 똥섬(糞島)이 보이는 바닷가였고, 1930년 대 후반에는 수인역이 마주보이는 나대지였다가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군 포로수용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이후 원목 등을 쌓아놓던 노천창고에서 1978년 삼익건설이 아파트 두 동을 지었는데, 학교를 오가며 저런 아파트에서 살아봤으면 했던 인천 최초의 맨션아파트 뭐, 이런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십여 년 전 후쿠오카에 사는 시라네(白根) 노인을 따라 당신이 어렸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이런 생각은 언감생심이었겠지만, 느릿느릿하게 뱉어내는 말들을 주워 담아보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성과 삶의 변천 등에 대해서 생각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여, 아사히양조장(실내수영장 부근)과 모모산(광성고) 일대로 낙하하던 공수품을 구경하러 뛰어갔던 그 일본 아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밀린 원고 쓰기에 다각도로 집중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뒷덜미를 놓지 않는 더위는 말할 것도 없고, 덮친 격으로 정학유 선생이 쓴 ‘시명다식(詩名多識)’이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고 있다. 인천관련 기초자료들을 훑어보던 다락방에서 우연히 사두었던 책을 열어본 순간, 150여 년 전에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증적이고 사실적이며 문학적인 면면 또한 세심하게 풀어간 노작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산의 아들답다 라는 말보다 청출어람이 더 맞는 표현 같았다. 어쨌든 풀 한 포기를 비롯해 살아있는 생물에 대해 담백하면서도 소박한 묘사는 기원전 11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쓰인 ‘시경’을 독자로 하여금 유인하기에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강화 온수리 넘어 길정저수지 부근,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숲을 이룬 낮은 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화가 박충의 선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도시 숲에 있거나 나무숲에 있거나 별반 차이가 없는 건 살아 있음에 대한 응시의 시간과 유기체적인 세상은 공간을 달리해도 결국 같은 본질을 말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이상적인 공간을 만드는 통로이고 그 현실에 깊이 있는 성찰과 작업을 병행할 때 미래 또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거였다.

 

 여전히 덥다. 한 차례 소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한편 애틋하지만 자칫 수마를 불러들이는 일 같아 여간 소마소마한 게 아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는 걸 통감하는 데에는 필자에게도 원인이 있어 나대면서까지 더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토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에 대해서 존중과 애정 어린 성찰이 현재의 문제점들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바람마저 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