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놓다
정확한 지명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그 곳이 강원도 두메였고
키 낮은 개울이 거울처럼 창백하게 흘러
홍천강으로 우르르 몰려간다는 것을
훨씬 후에 알았다는 사실 외에는
모든 기억이 어슴푸레할 뿐
톡, 건드리기만 하면
무더기로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이
산 끝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스라한 지평 너머 여명은
어둠의 잔여분을 사그라지게 하려는 듯
아침 놀을 사르고
무겁게 짓누르던 어둠의 손목이
개천을 열어주었을 무렵
개기름처럼 미끄덩거리던 몸은
비로소 악몽을 벗어던진 듯
물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부풀대로 부푼 종잇장처럼
자갈과 바위에 붙박혀 있던 이끼들은
짐승처럼 달겨들어 신새벽을 겁탈하는
젊은 청년의 맨 몸을 가만두질 않았다
이리 쓰러뜨리고 저리 쓰러뜨리고
광무의 도가니로 몰아가버렸다
소름이 돋을 무렵
비로소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강원도 차디찬 무명의 실개천
줄거미 즐비하게 늘어서
생태의 참혹한 유혹이 넘치는 전선
개굴창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였다
원효 그리고 일체유심조
해골 같은 나락에서 갓 건져올린
고결한 쓰레기 한 토막이 풍겨대는
무자비한 똥냄새
아,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찔레 숲을 보았다
무감녹색 자잘한 형극이 지천으로 깔린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꿈에서나 느낄 수 있고
애인의 살 틈 깊숙히 내재돼
욕망이 헛걸음친 뒤에 찾아든 평온 같은
향내음
실전 같은 나날 속에서
늘 현실은 꿈이었기를 바라는
뒷물의 추억은 반복되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고이고
하릴없이 너스레를 떠는 가벼운 말 솜씨에도
웃음은 터져나왔다
별자리 하나 볼 수 없는 이슥한 밤
우연히, 이지러지는 하현달을 바라보며 감동해 하고
나뭇가지들이 서로의 몸을 부비며
사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온 몸이 비비 꼬이는
깊은 밤이 드디어 지났다
꿈을 놓자마자
다시 꿈이 만들어졌다
현실이 되기 위하여
꿈이 되어야만 하는 아침에
그 날
똥물에서 목욕했던 광경과 비슷한
꽃들이
담을 넘어오고 있던 거였다
징한 향기
가슴 절절했던 갈망을 갈아엎으며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