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1
이슥해져 가는 밤
나의 애마 떠돌이가 안내하는 길은
십 년이 넘도록 눈썹이 휘날리고
이미가 벗겨지도록 줄기차게 다녔던 낯익음 그 자체였다
열쇠를 꽂고 시동을 켜는 순간
구글 영상 길 안내 지도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행선지
길의 굽, 오가는 자동차들의 질주 본능이 시험 받는 교차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 눈에 박혀 체질화된 길의 그림이 읽혀지고 있었다
도로의 폭이 한 쪽은 길고 다른 한 쪽이 짧은
신광초등학교 네거리는 이 날도
방향을 지시하는 느릿한 황색등으로 인해
꼬리를 물고 진입하는 몇 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대각의 차선에서 심장을 쿵쾅거리며 질주를 기다리던
차량의 행렬들이 저마다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이발관이 폐업을 함에 따라
늘 잠시 잠깐이었지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던 생각의 말 꼬리 물기 장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신 |
광 |
이 |
발 |
간판의 모양새는 이러구러
윗칸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가면 점포 주인의 의도대로 읽혀지는 거였고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읽어내리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혀지는......
연동식 신호제어 장치가 요원할 뿐인
이 네거리에서
나는 늘 다음 신호를 대기해야 했었다.
이 날 밤도
순간,
차창이 내리올려지는 틈에
뭔가가 창 밖으로 내던져졌다
빈 답배 갑이었다
이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차 안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 목격되고
아마, 막담배였을 것이고 차에 뭔가를 남겨두기엔
둘 만의 깔끔함이 보장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지
버린 빈 답배 갑이었다.
"왜, 담배 갑을 밖에 버리남?"
웃음 반을 머금고 말을 건내면
대개는 겸연쩍게 웃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 건 좀 다른 분위기였다
다짜고짜 반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내가 버렸다고!"
"내가 버렸다고~!"를 게송처럼 연발하는
사내의 목 뺀 얼굴에는 잔뜩 적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자라 목이 돼버렸다
순간,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갑자기 변하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성인의 세계도 사라지고
더군다나 어른이 실종된 거리에서
우격다짐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목을 감춘 자라처럼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말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불꽃처럼 이지러지고 있었다
친구들에겐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후배 및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는 물론 말할 나위 없게시리......
스무 살 시절
폭압과 독재의 시절을 맞서왔던 이력이 무색해지는
참담해지는 이 밤에,
"그래, 알았다. 내가 너희들 대신 버려줄 게"라고 말한 뒤
담배 갑을 집어들어 목적지까지 갖고 오고 말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