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탕에 앉아 여행을 떠올리면서

濟 雲 堂 2010. 3. 6. 23:59

무한궤도처럼 혹은 쳇바퀴처럼

맞물려 있지 않으면

마치 큰 탈이라도 날 것 같은

일상, 또는 제한된 공간에서

 

여행은 일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질긴 고무줄 같은 회귀성을

결코 놓아 본 적이 없는

천부적 유전자를 지닌 것만 같다

 

그래서 여행인가 보다

무한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서도

아예 떠나버리면 숨어버려 돌아오지 않으마 마음 먹었음에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 무엇은

명증할 수 없는 여행의 맛

 

거기에는 새로운 희망과

좌절과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할 시간에 대한

막연함 가득한 카오스가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둔탁함 이전의 맑음,

이면지처럼 흐릿한 배면의 낙서들과 공존하는 데에는

또 다른 무엇을 훔쳐보게 만들곤 한다

 

여행을 떠나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 외치는

정화된 자아 속에는

짐을 털어버리고 돌아왔음에도

이승의 그림자를 떨어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부지불식 스며들어 있음이 발견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

비루한 일상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케 되는 동질감 투성의

사람살이를 둘러보면서

사람 사는 곳

사람이 살아가야할 이 곳은

결국 희로애락애오욕이 넘실거리는 바다였고

나는 미물 같은, 비늘을

돌돌 말아서 몸에 두른 한 마리 물고기였던 것이다

 

앙금이었던 심저를 어지럽혀 놓는

맞대면적 나, 결국 너이겠지만

그마저도 나이기에

세상 어디를 가든 이색적이거나 이방인이거나 함은

금새 나의 일상적 이해심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1990년 여행자유화 조치가 선포되면서

그 동안, 자유총연맹 교육장에 가서

몇 시간 씩 반공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만이

여권을 교부받을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이 교차되었다

당시 중국 방문의 엄청난 충격도

따지고 보면 내가 살았던 지리적 공간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치러냈던 것들이었음을 뒤로하고

후진적 작태라고 비아냥거렸던 기억도 저장돼 있음이다

 

일본과 비자 무허 체결이 이뤄지기 전

감히, 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자존심 상해하면서

몇 몇 도시들을 둘러보고나니

이마저도 이해해버린 나약한 한국인의 초상이

유리창 너머로 반사되곤 했던 여정 이후도

 

일탈 행위가 이탈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탈은 곧 현재성의 공간이동이었다

여전한 그리움, 외로움, 고적함

그 극복과정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식, 색, 정 그리고 존재감이 동체이심 같은 그림자를

결코 떨쳐내지는 못할 것임을 애써 부인하면서

여전히 일탈의 생채기는 가슴 언저리에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 시대에 마지막으로 존재할 것만 같은

삼 천원 짜리 목욕탕엘 들어갔다

대개 동네 목욕탕의 단점은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개 숙여 인사하기 바쁘다는 것과 규모와 시설이

근자에 설비된 여타의 찜질방 등의 것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해 보인다는 것 외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15년 간 줄기차게 입고 다니는 조끼를 벗어

수납장에 넣고는 윗도리를 통째로 벗어

뚜루르 말듯이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다

역시, 숙달된 동작으로 빤쓰와 양말을 동시에

바짓가랑이에 결쳐질 수 있도록 한꺼번에 벗어 던진다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검정 고무줄을 마지막으로 풀어 놓고

제대로 잠겼는지 문고리를 흔들어보고는

목간탕 문을 열어 혹시 인사를 하지 않은 형들이 있나 없나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본다

 

안개 속 세상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된다는 잇점을

최대한 살리지 않으면 삐친 동네 형들로부터

싸가지 없다는 핀잔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 만다

큰 형님 친구들을 비롯해서

다섯 째 형에 이르기까지 말인 즉,

 

머리를 감고

적당히 비누질한 몸을 물로 닦아내고는

엄지 발가락부터

슬그머니 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무르팍을 지나 허벅지까지 닿았던 수면의 따끈함이 

별 느낌없이 통과해버린 불알께를 지나

배꼽 부위에서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계단처럼 꾸며진 수조의 턱에 가만히 엉덩이를 부착시킨다

 

5분

5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조금 전까지 여행에 대한 단상들로

머리를 채웠던 순간들을 까맣게 잊게 하기 때문이다

머리 끝에서 쪼르륵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턱 수염에 매달려 있던 땀방울도 흘러내린다

탕 속 물과 합체되는 순간

공간이동이라는 현실적 주제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물화되는 이 공간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울먹거리며 태어났던 기억의 저 편을 통과해

물 속에 앉아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는

현재조차도 가이없는 연장선상의 일부가 아니었는가

생각이 스치고 있다. 

몸이 후끈거린다. 또 다른 나에게 달아있으므로

거적처럼 벗어던져버린 껍질들이 느닷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