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당, 두리반 그리고 경인년 폭설
지난 기축년 벽두와 세밑을 우울하게 장식했던 사건의 두 현장을 둘러보았다. 용산의 남일당과 홍대 앞 두리반 식당 주변은 일 년 가까운 터울이 있었음에도 을씨년스럽기는 매 한가지 모습이었다. 도시 재정비 사업의 손아귀에 할퀴어 멍들고 상처 나지 않은 도시가 없지만, 성실과 신념으로 가난한 삶을 극복하고자 했던 남일당에서는 참혹한 주검의 흔적들이, 두리반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약자로 살아가야 할 세입자들의 어두운 그늘이 삭풍에 단단히 오그라진 채 뭉그러져 있었다. 독일계 미국 신학자였던 라인홀트 니버의 화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씻기 어려운 그늘이었다.
2002년 도입돼 현재까지 ‘도시 재정비 사업’이란 이름으로 치러지는 일련의 사업들 이면에는 미명보다는 오명이, 성실한 부의 축적보다는 땅과 관련된 투기성 불로소득들이 판을 쳤던 게 현실이었다. 토지로부터 획득한 자산규모와 면적을 따져보면, 과거 전두환 정권부터 불기 시작한 재개발 면적에 맞먹을 정도로 그 진행 속도와 양적 면에서 삽시간에 이루어졌다는 통계를 보더라도 그 위험수위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더군다나 재개발의 명분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었고 표를 몰아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 층임에도 이들에게 실익을 안겨주기는커녕 사회적 망실감을 증폭시켜 정치적 무관심과 배타적 이웃관계를 조장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할 문제이다. 개인의 토지와 건물은 분명 재산권자로서 권리를 부여받고 사회적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세입자들의 권리 또한 유무형의 자산으로써 보호받아야 함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진데, 도시 재개발에 따른 악순환의 매듭은 끊어질 줄 모르고 여기저기 순박한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옭아매고 있다.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시민들을 자본주의 개발 방식의 도매금으로 정치하려는 개발론자들과 위정자들의 천박성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꿈을 무너뜨리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 지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사건과 두리반, 아니 우리 사회에 불거지고 있는 도시재정비 사업의 부조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상황이라는 것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 한 걸음 앞서 도시재정비사업에 대한 개념정립과 사업수행의 방향성을 총체적으로 재고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심각하게 제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사후약방문’처럼 총리와 서울시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여러 가지 보상의 조건들을 맞췄다한들 배후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는 법이다. 인천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 가난한 소시민의 이마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게 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 신의성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 도시재정비 사업의 정당성을 논의해야함이 마땅히 적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쟝 자크 루소의 주장을 빌면 “사회와 법은 가난한 자에게 새로운 구속을 부과하고, 부자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한다는 설명에 힘이 실리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인년 새해다. 새로움은 새 것인 채로 지난한 삶의 촛불을 불 지피기에 충분한 시간성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긍정의 힘은 그래서 위대하다. 긍정의 힘은 진실 됨에서 출발한다. 진리가 늘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진실이 뚜벅뚜벅 걸어 가야할 좌표를 결코 손 놓아 본적 없다는 것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용산참사의 진원지인 남일당에서 전해지는 낭보는 참살이가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홍대 앞 두리반 식당의 암울한 소식 또한 우리가 헤쳐 나가야할 역사의 해학이 아닐 수 없다. 새해 벽두에 내린 폭설로 온 땅이 불편해 하고 있다. 그러나 엄동설한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안다. 언 가슴을 헤집고 끝내 봄이 안긴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