伐草..., 罰楚
사촌 형제들이 선산 납골당에 합장을 권유했음에도
백석 천주교 묘지에 모신 아버지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언제든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보기 위해서였다
벽진 이 씨 일가라고 해서
많은 수의 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합장의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충청도 합덕 선산을 마음 밖으로 물리고
혼자 고집을 부리고 말았다.
시간의 일상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똑 같이 부여됨으로
공평한 삶의 시간대에서
짬이 되면 늘 가까이 찾아가 뵙는 게 낫다는 걸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일 년 오 년, 그리고 십년 동안은
약속이 잘 지켜졌었다 하지만
바빠진 일상도 일상이지만
일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졌고
일의 내용이 더 깊어질 무렵부터는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추석 대목을 목전에 두고
추석 당일 아침에 흐트러진 뼈 조각 맞추 듯
피로에 지친 몸을 부여 잡고
낫질 하기에 버거울 것 같아
아버지 묫자리를 진작에 찾아갔다
그러나 놀라움 투성이었다
불볕 더위가 기승 부리던 지난 여름
잠깐 들렀을 때에는 그닥스럽지 않더니만
웬 걸, 잡초에 낙엽에 새 똥에
잡 쓰레기들이 버려진 이불처럼 덮여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의 생이 자연의 한 조각이자 일부라면서
읊조리고 홀연 떠났던 누군가의 유언과 일치하 듯
아버지 무덤은 원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죄스러움 이전에
누군가 이 꼴을 보고
혀를 찰 것 같아
팔을 걷어 붙이고
부리나케 깎아내려가기를
한 시간 여
최초의 모양을 지켜낸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삶에 대한 의지도,
죽음 이후에 무변할 것 같던
애절함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묘한 것은
허다하게 흘리는 땀이지만
벌초를 하면서 흘리는 땀은
왠지 기묘한 쾌감이 깃든다는 걸
번번이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분 앞에는 속된 표현일망정
살아 있는 자손들은
그렇게 흘리는 땀을 통해
흐트러진 가족애를 결속시키고
모종의 선택과 집중으로 몰아 간다는 거
여하간
속이 풀리니
일상이 제법 자유로워 진다
전화를 건다
형님들~!
거긴 어떠슈?
벌초들 하셨나요?
여기 아버지는 제가 했고요
거기 어머니는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