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伐草..., 罰楚

濟 雲 堂 2009. 10. 12. 17:35

 

사촌 형제들이 선산 납골당에 합장을 권유했음에도

백석 천주교 묘지에 모신 아버지를

그대로 놔둔 이유는

언제든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보기 위해서였다

 

벽진 이 씨 일가라고 해서

많은 수의 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합장의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충청도 합덕 선산을 마음 밖으로 물리고

혼자 고집을 부리고 말았다.

 

시간의 일상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똑 같이 부여됨으로

공평한 삶의 시간대에서

짬이 되면 늘 가까이 찾아가 뵙는 게 낫다는 걸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일 년 오 년, 그리고 십년 동안은

약속이 잘 지켜졌었다 하지만

바빠진 일상도 일상이지만

일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졌고

일의 내용이 더 깊어질 무렵부터는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추석 대목을 목전에 두고

추석 당일 아침에 흐트러진 뼈 조각 맞추 듯

피로에 지친 몸을 부여 잡고

낫질 하기에 버거울 것 같아

아버지 묫자리를 진작에 찾아갔다

 

그러나 놀라움 투성이었다

불볕 더위가 기승 부리던 지난 여름

잠깐 들렀을 때에는 그닥스럽지 않더니만

웬 걸, 잡초에 낙엽에 새 똥에

잡 쓰레기들이 버려진 이불처럼 덮여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의 생이 자연의 한 조각이자 일부라면서

읊조리고 홀연 떠났던 누군가의 유언과 일치하 듯

아버지 무덤은 원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죄스러움 이전에

누군가 이 꼴을 보고

혀를 찰 것 같아

팔을 걷어 붙이고 

부리나케 깎아내려가기를

한 시간 여

 

 

최초의 모양을 지켜낸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삶에 대한 의지도,

죽음 이후에 무변할 것 같던

애절함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묘한 것은

허다하게 흘리는 땀이지만

벌초를 하면서 흘리는 땀은

왠지 기묘한 쾌감이 깃든다는 걸

번번이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분 앞에는 속된 표현일망정

살아 있는 자손들은

그렇게 흘리는 땀을 통해

흐트러진 가족애를 결속시키고

모종의 선택과 집중으로 몰아 간다는 거

 

여하간

속이 풀리니

일상이 제법 자유로워 진다

 

전화를 건다

형님들~!

거긴 어떠슈?

벌초들 하셨나요?

여기 아버지는 제가 했고요

거기 어머니는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