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집

우리 시대 최후의 솜틀집

濟 雲 堂 2009. 7. 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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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동 굴다리 웃터 길로 조금 더 오르면

운교(雲橋), 구름다리로 불리는 '화평운교'가 나온다

 

불편함은 곧

편리를 생산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우리의 삶처럼

우리 시대 근대사의 괴물이었던 인경철도(1899~)가

화도동과 평동 일대 그리고

송월동을 가로지르며 통행을 불편하게 하자

그 언덕배기에 다리를 놓게 된 것이

이른바 화평동 구름다리였다

 

1965년, 새로운 세멘트 공법으로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는 가운데

그 구름다리 곁에서 솜틀집을 운영하던 박 씨 댁

은율 솜틀집이 있었다

 

'있었다' 라고 과거형을 쓴 데에는

이미 사라졌거나 박제화 됐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것쯤을

굳이 뇌까리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은율' 이라는 지명은

인천사람이라면 생소함을 넘어

구구절절 익숙한 단어이자 지명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황해도 은율은

드넓은 농토와 탈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고장이지만

한국전쟁의 여파를 쓰나미처럼 무겁게 치받던 고장이기도 했던 곳이다

 그래서 인천은

전국에서도 보기드믈게

과거의 현상을 끌어 안고 사는 도시라는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이 있다

 

전라도를 머리로 충청도, 황해 및 이북 5도

경상도, 강원도 민 순으로

인천의 인구가 분포돼 있다

물론, 제일 꼬락지는 인천 출생자들이다(1990년 출생 이후 무산자 제외)

 

여하간

은율 솜틀집 박 씨 댁은

1970년 초반, 수출 경기의 호영향으로

낡은 단층 목조 집을 허물고 삼 층으로 집을 지었고

그 덕에 난생처음으로 양옥 집 친구를 둔 사연을 갖게 되었다

 

현재 은율 솜틀집에서

철컥철컥 일률적으로 돌아가던

솜틀 기계는

어르신의 사망 이후 장남이 운영하다가

그 장남마저 지병으로 사망하자

네 누이 분과 늙다리 총각 한 놈을 뒤로 남기고

송현동 수도국 산 '달동네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상황이다

 

송림동 3번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솜틀집은

현재 간판도, 전화도 없이(아는 사람만 아는)

최후의 시간을 돌리고 있는 듯해 보였다

 

육중한 모터 대신에 작고 매끄한 것으로 바뀌었고

넓고 위험스럽 보였던 평 벨트 대신에

가늘고 얇상한 V자 형 벨트,

젊고 강직해 보이는 우리 시대 제 3의 성(性)인 아줌마 대신에

고된 삶이란 이면을 간직한

할머니 한 분이

당시의 상황이 이랬을 것이다 라고

재현하고 있을 뿐 별 반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근대 시대 서구 문물의 유입과정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것은

물품의 내력과 중량의 표시가 작은 글씨로 담겨져 있는

광고지이다

 

덧대서 말하면

어느 나라, 어느 도시, 누구가 만든 제품인가를

기록해 놓은, 상표를 총괄하는 딱지인데

요즘이나 그 때나 제품만을 상징 처리하는 습관은 문제가 있지만

누가 상품의 딱지를 세세하게 읽겠냐 마는 식으로 넘어가다보니

상표 안에 담긴 광고의 미학과 철학을

무심코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일 것이다

 

믿을 신(信)를 주물처리해서 만든

이 솜틀 기계가 주는 매력은

흥분을 뛰어 넘는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일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