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머리카락 베어 신발 삼는 뜻(議政 誌)

濟 雲 堂 2009. 6. 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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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베어 신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일용하는 모든 도구에 최첨단이란 접두어가 붙어 다니는 요즘 세상에 다소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전해져 오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더군다나 부모가 주신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겼을 지난 전통사회에서의 통념을 깨뜨리듯 파격적 행위인 머리카락을 베어내 짚신 또는 미투리를 만들어 쓸 정도라면, 뭔가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패션과 실용이 극대화 되어 만들어지는 요즘 신발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림없는 일이지만, 불과 사십 년 전만 해도 외진 산골마을만 가더라도 촌로들이 즐겨 만들어 신고 다녔던 것이 ‘볏짚표 짚신’이었고 ‘삼나무 또는 칡표 미투리’였었다. 우스갯말의 본질은 웃자는 데에 있으므로 굳이 볏짚표, 칡표에 마음을 두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증된 이야기지만 짚신은 서민들의 대표적인 신발이고, 미투리는 이 보다는 좀 더 질기고 정성이 가미된 값비싼 신발로 애용돼 왔었다. 알다시피 맨 땅에서 짚신이 신발로써의 구실을 얼마나 충실했을지는 상상이 필요치 않겠지만 머리카락을 베어 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베어 신발 삼을’ 때에는 어지간한 정성과 사랑이 묻어나지 않으면 선물로 줄 것이란 생각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깃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관계적인 측면에서 신발 이야기를 말머리에 올려놓은 이유는, 십여 년 전 안동시 정상동 택지조성공사 당시 고성 이씨 문중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응태(1556~1586)의 관에서 부인의 편지와 ‘머리카락을 베어 삼은 미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심금을 절절히 울린 사건이 있어서였다. 젊은 나이에 먼저 돌아간 남편 ‘원이 아버지’에게 쓴 아내의 편지 내용을 유심히 보게 되면, 지어미로서 자존심의 꼭두머리에 얹혀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 좋은 세상 갈 때 신으라고 미투리를 만들어 부장했다는 사실은 지고한 사랑 그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깊은 맛을 낼 때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깊은 맛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쯤은 애먼 설명이 될 것이다.

이 쯤 되면, 세상만사 모든 일의 뿌리가 되는 생각의 중심에 마음, 그 것도 진정한 마음이 우선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백 년 묵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가 하례로 올리는 삼배에는 인간적 겸양과 하늘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땅의 수고와 복됨을 기려 절을 올린다고 한다. 오늘날 ‘민의’의 산삼을 캐려는 정치 지망생들과 위정자들이 갖춰야할 덕목과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정치는 법의 원칙을 준수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정치와 법의 체제는 같은 솥단지에서 나온 밥과 같은 존재이다. 이 두 글자의 원래 자형을 풀어보면 모두 물과 관련되어 있다. 정치(政治)와 법(法), 다시 말해서 물 수(水) 변을 모두 꿰차고 있는 한자의 의미처럼 ‘물 흐르는 대로’라는 사상적 조류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공을 역류하지 않는 가운데 넓고 깊게 흘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기에 고래로부터 법과 정치의 개념을 ‘물처럼’ 여기지 않았나 싶다. 이 대목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최상의 가치 기준은 ‘마음’이다. 그냥 마음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민의를 헤아리고 겸양으로 실천했다면, 제아무리 선택적 행위였고 어쩔 수 없이 다중의 뜻에 위배됐다손 치더라도 이를 헤아려주지 못할 민심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민도가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고난과 위기의 현대사를 슬기롭게 극복하려했던 의지들이 사회 곳곳에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베어 신발 삼는’ 마음과 민심을 ‘하늘의 마음’으로 여겨 ‘물’처럼 위정한다면 위기의 세기라 일컫는 오늘날은 결국, 일종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