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를 보면
바나나를 볼 때마다
자동 모드처럼
어머니가 떠 올려진다
오래된 생각의 창고 벽면에
대못으로 박혀 있는
어머니는 곧 바나나라는 코드명이
어린 시절
우리들 손에 쥐어지는 과일은
사과 아니면 귤이 전부였다
여름에는 비교적
수박 참외 포도 딸기 등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그나마 과일의 가지 수를 채울 정도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즈음
도시락을 급히 먹었던지
아니면, 친구의 도시락 밑 바닥에 숨겨놓은
달걀부침을 몰래 빼 먹어서 그랬는지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제물포에서 신포동까지
걷기에는 좀 멀었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치받칠 구간이었기에
조금 꾀만 나면 애매라는 갈등구조로
게으름 피우기에 아주 좋은 통학거리였다
버스 차장 누나가 밀어 올려주는 손길에
묘한 성적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밀리고 밀려, 아니 구겨넣을 대로 구겨넣은
이종의 물질들이
한 데 섞여 풍겨내는 버스 안은
마음만 먹으면 즐거운 아수라가 되었다
헌데,
그날은 모든 게 온전치 않았다
버스 차장 누나가 오라이~! 소리를 외치며
동전의 옆댕이로 버스 옆 면을 두드리는 것도 거슬렸고
책가방을 받아주던 어느 여학생의 파리한 손길도
거추장스러웠던, 이를 데 없이 불편한 그 자체의 순간이었다
학생들을 동인천 역으로 쏟아 부은
버스의 내실에 평온이 오고나서야
불안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사실,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고
상황 판단 능력을 어떻게 검증 받느냐 하는
스톱워치가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점철하는 순간이었다
친구 도시락에 감춰 둔 달걀을 몰래 먹어서 그런 건가
잡곡을 의무적으로 넣어야 할 도시락에
어머니는 쌀 밥을 더 멕이겠다고
보리를 따로 쪄서 도시락 표면을 검게 도배하곤 하셨는데
그 게 잘못돼서 그런 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자거리를 가로 지른 다음
가방을 후딱 내팽겨 치고 화장실로 들어가야지
아니 아니, 가방을 어디에다 던져 놓을까
자칫 잘못했다간 김치를 담았던
마요네즈 병이 깨지기라도 하면
지난 번처럼 책에 김칫국물이 흐를 텐데 말이지
일단은 모자와 교복 윗도리를 쌀 가마 위에다
던져 놓고 부리나케 혁대를 푼 다음
흐흐흐
드디어 갈등이 해소되었다
불안과 다방으로 머리를 썼던
고역들이 한 순간에 해제되는 순간
아, 이런 게 천국이구나를 느끼고 있을 무렵
그 때,
어머니는 화장실 문을 박차듯 열어 젖히시고는
당신이 손수 까 주신
바나나를
불쑥 내 입에 넣어 주시는 게 아닌가
]
뱉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강박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맛볼 겨를도 없이 무조건 삼키고 말았다
이후,
나는 호불호를 떠나
화장실을 갈 때면
뭔가를,
흐흐흐
들고 들어가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이 모두
어머니 때문에 생겨난
고역과 즐김의 삼중나선구조적
새로운 유전자의 변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