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 雲 堂 2009. 5. 3. 00:36

1. 그녀가 풍선을 불고 있다

 

오줌, 똥

가래침으로 기록되는

신포주점 뒷골목에서

그녀가

풍선을 불고 있다.

 

독쟁이 고개

거북시장 고가 다리 밑,

사나운 바닷바람도

허리띠 풀고 쉬어 간다는

선린동 청관

구석진 옥탑 방에서

그녀가 풍선을 팔았다는 것을

누군가 귀띔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

오도 가도 못하는 무풍의 구도심에서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떠다니는 것이

어찌 유목민의 피 탓이런가.

 

펄럭이는 윗도리 너머

돛대처럼 유두가 솟구쳐 있는 밤

처마 낮은 집의 그늘을

깊이 눌러 쓴

신포주점 뒷골목에서

그녀가

바람을

모으고 있다.

 

 

2. 화수동

 

 

뭍으로 나왔으니

바다로

돌아가야지

먼 옛날

꽃마을은

곶 마을이었다는데

 

뼛속까지

사람을 품다가

이지러지고 마는 무네미 마을은

이름 뿐.

 

귀 잠든 화수동 골목

문득, 능금나무 똘기가

담장 가에 구쁘게 보이는

깜깜 어둠길에서

 

산 낙지가 먹고 싶다는

친구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뭍으로 나왔으니

바다로

돌아가야지.

 

3.오래된 우물

 

아무도 뛰어 놀지 않는 골목길에

우물이 혼자 있다

 

우물 담에 불알 문대던 아이들이

우물보다 키가 더 커지고부터

우물은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다

 

아무도 더는,

삶을 꿈꾸지 않는

송월동

재개발지에서

 

한 때

유년의 기억을

날카롭게 지배했던,

늙은 자궁 하나가

물끄러미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4. 재개발 지구

 

손가락을 다쳐

열 바늘 꿰매고 나니

온몸이 쑤셔댔다.

 

만분의 일만한 상처에

몸 전체가 신열이 나고

이러다가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뼈가 드러나도록

파헤쳐지고

붉은 육신마저 갈가리 찢겨나간

재능 대학교 앞길은

회복불능 지구

 

모든 상처에

아픔이 저장돼 있듯이

불현듯

손가락이 아파온다

 

도시가 온통 상처투성이다.

 

5. 향지여관 앞을 지나며

 

향지여관

지금은 사라진,

그 여관이 사라짐으로

은밀하게 저장되었던

기억도 잊혀져간다.

 

David W Deshler

大是羅

우리나라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주선한 사람

대시라 은행, 운산금광의 노다지 관리 담당관

이 십 사세의 미국 청년.

 

향지여관이 사라짐으로

인천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일본식 정원과

양옥집 두 채의 데쉴러 저택은

다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 집 앞뜰을 지나다가

내 어머니 글맵시와 너무도 닮아 있는

널판때기를 바라본다.

 

기억 중독자의 시선을

단박에 무디게 만드는 대범한 문체가

와락, 가슴에 안기고 있다

 

찍이

걱곶

이세

를쓰

묻레

찟기

마및

 

6. 일인 시위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내일은 어제의 오늘이 된다.

 

배다리 산업도로 조성지 인근에서

헌 책방을 하는 곽현숙 씨는

백 일째 시청 앞에서

 

<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할 인천의 역사입니다>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세상 여자는

어머니 아니면 딸이다

그 외에는

모두 유보된 애인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를

애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길다

내일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므로

어제의 오늘이

너무 외롭다.

 

7. 연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연시를 따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감별할 수 없는

눈두덩 속으로

붉은 점이

하나 둘

저장되고 있다.

 

기껍다

아직 말캉거리는

초겨울

핏덩이

 

8. 활터고개

 

집은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서서

언덕을 오른다.

 

집은

무량의 먼지로 지었을까

덤프트럭 한 대가

헐떡거리며

우주를 횡단하고 있다

 

송림동 5번지는

살아서도 말이 없더니만

죽어서도 끝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9. 추모시追母侍

 

이 세상

모든 여자는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어머니를

다시,

어머니가 어머니를

그러고 보니

나도 어머니를 낳았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미였으므로

이 세상

모든 여자는

저 세상에서도

어머니이다.

 

10. 월아천月牙泉 보신탕집에서

 

내 뱃속을 채우는 것은

명사산鳴砂山 모래 바람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같은 도시

맹독한 빌딩숲 그늘 아래서

바람은 그렇게 소스라치며 울었던가

 

사람의 품보다 더 좋은

안식이 없다는 것을

월아천에서 깨닫는다.

 

길이 또 사라졌다

굶주린 유목민의 눈빛도

도시를 떠난 낙타의 족적도

찾아가야할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선가 별을 헤아리며

풀뿌리 한 입 물고 올

가슴 뜨거운

그 사람.

 

11. 신발 두 켤레

 

새벽에 눈이 내린다는 것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내가 겪어야 할 세상의 일 대부분은

새벽부터 소리 없이 쌓여

운명적으로 몸집을 키워가는 것을

 

그 때마다 나는

선잠이 들었거나

비몽의 외투를 너무 많이 껴입고 있었으므로

부지불식 눈이 내리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뒤척거리곤 했었다

 

불현듯,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호두알 두 개가 달그락 거렸다

아버지는 스륵스륵

겨울바람 비슷한 소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었지.

 

발인 전날 밤

강설 전야처럼 스르르르르

호두알 같은 바람이 불고 있다.

 

내일 새벽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아버지의 긴 발자국이

쑥대빗자루로 쓸리기 전에

사자 밥에 동전 세 개 씩을 꽂아두고

형님들 신발부터 올려놔야겠다.

 

12. 봄날은

 

겨우내

홀로였을

모과 열매 하나가

해골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다.

 

바람을 잔뜩 품은

비닐 봉투가

검은 깃발처럼

나무를 흔들고 있다

 

연분홍

모과 꽃이 관통하는

봄날의 공허

 

사위어가는

흔적조차

아름답다.

 

13. 청량산에서

 

나무는

가지가 부러졌어도

목이 부러진 거다. 바람에

잎사귀가 떨어졌어도

나무는

지상으로 돌출된 몸뚱아리 전부가

하나의 대가리인 셈이다.

 

거칠고 메마른 동안거

흥륜사 산방 아래에는

오기를 등걸마다 수놓은

아카시 나무들이

목이 부러진 채

단단히 서 있었다.

 

나무는

뿌리를 빼 놓고

전체가 대가리라 하지 않았던가.

 

아, 모가지에 매달려

목울대를 핥고 있는

넝쿨의 혓바닥

 

청량산 북향

후미진 골짜기

아카시 나무들이

젊은 비구승처럼

단단히

있다.

 

14. 포르노 영화를 밤새보고 잠든 날

 

나는 가끔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는

꿈을 꾼다.

 

살구 빛 가슴팍에

팥 알갱이처럼 야무지게 박힌 유두를

바싹 쪼그라들 때까지

쪽쪽 빨아먹는 꿈.

 

포르노 영화를 보면서

섹스란, 내 삶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라고 써 보았다.

섹스란, 이성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삶의 힘, 그 에너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도 써 보았다

섹스란, 물고 빨고 씹어대고 삼키고 핥아주고 싸고 닦아주고 가려주고 웃고 울고 싸우다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가 다시 좋아져서 자꾸만 하고 싶고 귀찮아서 내버리고 싶다가도

결국, 안아주는 것이다.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라고 마지막으로 써 보았다.

 

포르노 영화를 밤새보고

잠이 들 무렵

누군가의 베갯머리 밭은

혈흔이 마르지 않은 채였다.

 

기형적으로 늙어가는 아내의 자궁에서

네 발로 기어 나온 사내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15. 욕쟁이 할멈

 

이른 새벽

저자거리 한 가운데서 할멈은

욕을 게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쥐어짜는 욕설들

말마따나 저주를 뿌리고 다녔다.

 

약관의 나이에 배웠을 나의 욕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군대 생활을 빙자한 감각적 삶의 잔재였다면

할멈의 욕은 시대를 뛰어 넘고

국제적이고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고승들이 읊는 게송偈頌이었다.

 

소 말 쥐 조기 가오리 해바라기 돼지

두더지 고양이 동태 고등어 갈치 똥

조개 아오지 탄광 개 씹 좃 보지

 

성기에 빗대어 쏟아져

자막 밖으로 질펀하게 흐르는

성애영화 속 신음들이 저자거리를 채웠다. 그러나

할멈의 게송이 에로틱하거나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시장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며칠을 머리 싸매고

단어 한 마디, 문장 한 줄을

원고지 빈 구멍에 끼웠다 빼냈다가

기어이 빼도 박도 못한 채 마감했던

비루한 원고들이거나

시름과 분노에 젖어 더 이상 먹고 살기에 힘 부친

노점상들의 넋두리와는 분명히 다른

할멈의 기이한 주술

 

달래보고 얼러도 보지만

할멈을 진정 시킬 수 있는 해법은 없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거친 처녀시절과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푸성귀 따위를 팔아온 신포동에서

할멈은 중국말도 자유자재로 구사해

할멈의 중국말 욕설은 가관을 넘어 진문眞文 같은 것이기도 했다

 

<강호 정육점> 왕 서방도 해석을 꺼려

입 다물지 못할 지경이면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른 몸을

냅다 남의 집 가판에 던져 놓고는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할멈이 술에서 깨어나면

두 시간 가량 펼쳐졌던 욕설 사건은

여느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할멈의 면전에서 어느 누구도

후일담을 늘어놓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신포시장 욕쟁이 할멈의

새벽 저주 배설 사건은

존재했어도 부재해야만 하는

혼미했던 새벽의 몽환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