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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 목간탕에 대한 상상

濟 雲 堂 2009. 3. 24. 00:17

 

41801

 

 

자주 출몰하는 이상 기후의 표징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1904년 정식으로 기상업무를 보기 시작한

인천의 경우

역대 여타 도시에 비해 강수량 내지는

안개 출몰 빈도수 그리고 태풍의 행보 등을

비춰 봤을 때

천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도시로

기록돼 있다

 

인천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건조한 도시로 정평이 났다

仁川

역사적 변천 과정은 이와 다르게

훨씬 요상한 형질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미추홀=>매소홀=>소성현=>경원=>인주=>인천=>제물포(제물량,제물진)=>인천

이 가운데 인주에서 인천으로 넘어가는 대목에 주목해야 하는데

仁州 - 水 = 仁川라는 점이다

어진 고을이었다가 이자겸의 역성혁명 불발로 인해

불경스런 곳이라 해서 주(州)에서 한 단계 격하돼

물 수 변이 빠져 천(川)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물과 관계가 적은 지리적 조건임에도

뎅그마니 천(川)을 갖게된 것이다

자연 조건(물)이 짜서

동생인 온조에게 백성을 맡길 정도로

불망의 선택을 하게된 비류의 애닳음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공간에 전국적 유행을 낳게 된 것이

인천의 목간탕이다(해조탕)

일찍부터 목간탕 문화를 등에 업고

인천에 목욕업을 개시한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전국적 효시로 일컬어지는 공동 목욕당이 바로 그 것이다

 

목간탕이든 목욕탕이든

그 게 중요할까 마는

어릴 적 추억 몇 대목을 추스려 보면

1분 이상을 앉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답답했던 공간

발끝마저 담가보지 못할 만큼 뜨거운 탕

머리에 비누질을 하다가 가끔 씩

단수가 되거나

뜨거운 물 찬 물이 제대로 섞이질 않아

몸이 데이는 것 등은 다반사였었다

 

제일 골머리를 썩였던 것은

발가벗고 목욕하는 중에

같은 반 계집애를 만난 일이었다

집 안에 남자만 일곱이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목욕비 절감과 막내에 대한 알 수 없는 배려 탓에

함께 자주 가곤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뒷자리 계집애를 만난 것이었다

 

목욕탕이라도 컸으면 모를까

게딱지 만한 공간에 왜 그리도 마주치는지...

 

중학교 들어가기 전

고추 주변에 스멀스멀 펴오르듯

검고 굵은 모근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탕 속에 자그마치 30분 넘게 앉아 있었던 적도 있다

물리적으로 민감했던 당시

찰랑찰랑 물결치는 탕 물

꽃 피고 새 우는 봄 나들녘 부는 바람에

처녀 가슴 몸살 앓는다는 말 그대로

번데기 같던 고추를 은밀하게 자극하던

찰랑찰랑 흔들거리는 물결에 아랫도리가 갑자기

불끈해져 오는 게 아닌가 

 

가릴 수도 만질 수도 없을 상황에

몰래 훔쳐보았던 선데이 서울 표지 장정을 장식했던

모 언니들의 얼굴들은 왜 그리도 떠오르는지

뜨거운 물에 너무 담가 놔서인지

허리께로 붉게 데인 자국이

무서리로 따가왔었던

 

깨끗이 닦아내고

벌거벗은 채 잠이 드는 것 만큼 평온한 게 없다는

지론이 현재 목간 사후의 행보이다

걸칠 것 없으니 편하고 자유롭다

빤쓰에 끼워 넣은 고무줄조차도 불편해

아예 다 벗어 던지고 잠이 들어 버린다

이 십 여년을 그래왔으니

이 십 여년 동안 이 모습을 보고 자란

곁 가지들도 의례 그러는가 보다 한다

다만 곁 가지들의 친구 방문이 문제다

특히

 

인천에서 태어나 살면서

한담을 늘어 놓고보니

별 말을 다 널어 놓았다

한가롭게 주억거리며 떠벌리느니,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