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어른 되기 위하여
일 전에 모 신문사가 ‘인천인물 100인’을 책으로 엮어냈다. 내용과 선정과정은 차치 하더라도 공경하고 모범이 될만한 인물을 뽑고 이를 공유하게 됐다는 것은 인천지역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선정된 분들과 그 후손에게는 특히나 영광된 일이지만, 나아가 지역의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자리매김 했다는 점에서 후배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판치고 고난도의 경쟁과정을 거쳐야 만이 생존의 보루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못 배부른 낭만처럼 보이는 ‘어른’에 대한 상서로운 생각이 부지불식 떠오르는 연유이다. 제 눈앞에 놓인 현실적 가치 기준에서 쭉정이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이 서슬은, 폭압으로 일삼던 시대보다도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내어 어른에 대한 존재감을 무력화시켜버렸다. 풍랑을 헤쳐 나가기도 바쁜 세상에 어른타령이냐 할 만큼 삶의 환경은 대별되게 변하였다. 달라진 만큼 변화의 속도 또한 전광석화이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말도 참 말이 돼버렸다. 예의 이렇다보니 이웃집 어른은 물론이고 스승과 부모의 개념도 제 앞가림의 수단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얼치기 탕자를 양산하는 사회상이 심심찮게 거론되는 실정이다.
전국적 신드롬이라 일컬을 만큼 희대의 진풍경이 지난주에 펼쳐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이 그 것이다. 세태를 반증하듯 그칠 줄 모르는 조문 행렬은 종파와 정파 그리고 지방색을 한낮 관념의 휴지조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궂긴 소식에 따른 애도의 물결과 추도사는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치 겨울 가뭄에 허덕이던 전 국민의 가슴을 짭조름 적시고 말았던 것이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고맙다. 안구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의 후문은 장기기증이라는 파문으로 이어졌다. 새삼 ‘어른 됨’이란 막연한 정체성 논란을 마감하게 하는 대오각설이었음을 뇌까렸음은 물론이다. 풍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연한 이기심에 넌더리도 났을 법한데, 세상을 향해 고마웠다는 말과 마지막 남은 생명의 창마저 익명에게 내어주다니. 한 지아비로서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이제까지 살아온 물리적 공간을 돌이켜 보건데, 나를 누군가에게 건네줄 용기가 선 듯 나서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른’은 ‘어우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어우르다’의 사전적 의미가 복수를 단수로 만드는 데에 있다면, 아니 좀 더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남녀가 부부되기 위한 행위로써 ‘어울러’ 어른(한 몸)이 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물리적인 어른인 셈이다. 그러나 정신적 존재감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오늘날의 ‘어른’은 미래의 걸림돌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한국전쟁과 경제개발논리에 목숨 걸던 시대를 관통했던 부모세대의 엄격함을, 일찍이 체험한 사오십 대 부모들의 일반화된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후대에게는 도덕적 엄격함과 경제적 간난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 등을 되 물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해온 의지가 올곧이 자리 잡기는커녕 되레 치독으로 다가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의 암울함을 풀어낼 묘법은 없는가, 하물며 머리 맞대고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천인물 100인’선정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소식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무수한 사건의 배후에 여전히 비인간적, 반민주적 행태들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목숨을 업신여기는 것은 양념에 불과하다. 불현듯, 평생을 허허대며 큰 목소리 한번 내지 않고 조용히 꾸짖으시던 ‘어른’ 한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네게 아낌없이 사랑을 줬던 것처럼 네 자식, 네 이웃에게도 아낌없이 온정을 베풀 수 있겠느냐? 그 게 ‘어른’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