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신포시장의 어제 그리고 내일(경기일보)

濟 雲 堂 2009. 1. 3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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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장 일대에 근대적인 모습을 갖춘 시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개항의 여파가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였다. 1900년 12월 29일 인천부의 인가를 받아 제물포항 부근에 세워진 <인천 공동 어시장>이 그것이다. 이 시기는 전국의 육백 여 장터가 전통적인 짝수 날 거르기 방식으로 성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통적인 어촌의 형태를 띤 채 소규모의 민가들이 옹기종기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외세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외래문물이 쏟아지는 상황 하에서 제물포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하는 일대 전환기이기도 했다.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던 항구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고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그 변화에 맞춰 근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인천 공동 어시장>의 탄생은 시대적인 변화 요구에 발맞춰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지녔던 것이리라. 어쨌든 개항장 일대에 근대적인 시장의 형성은 인천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주었고, 근대시대로의 이행이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지 노릇을 담당했던 개항장 일대는 일본인들이 절대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그 위상이 갈수록 높아져 강제병합 당시 인천의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일본인은 그 세를 넓혀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일본의 강제병합에 따라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던 서양 열국의 영사관 및 무역사무소는 차례로 인천을 떠났거나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나마 천여 명의 중국인들만이 빼앗긴 나라의 제 3국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한 채 인천 사람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신포동에 정식으로 상설시장이 생겨난 것은 1926년 7월 1일의 일이다. 당시의 신포동 상권은 그야말로 정치, 경제, 금융, 교육,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관계로 오늘날 말하여지는 먹을거리, 놀거리, 볼거리들로 이미 융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인천의 노인들 입밖에 오르내리는 말 가운데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도 신포동에 가면 있고, 좋은 물건을 사려면 신포동으로 가라!’라는 말은 당시의 신포동 상권이 어떠했음을 반증하는 단서였다. 신포시장의 처음은 어시장과 푸성귀(야채) 시장으로부터 출발한다. 항구에 가까웠고 일찍이 외래 음식 문화가 발달하게 된 이 지역에 시장이 형성된 것은 자연발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푸성귀 시장의 주역은 대개가 중국인이었으며 인천의 개항과 거의 때를 같이해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은 중국 배와 외국의 상선들에 물과 음식을 납품해 돈을 벌어들였다. 그 때에 강 씨 왕 씨 성을 가진 두 농부에 의해서 재배된 야채가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외국의 야채가 국내에서 직접적으로 재배되는 일은 불법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신포동 시장에서 야채를 독점적으로 판매했던 사람들은 중국인이었고, 현재 그들의 자손 몇몇은 업태가 바뀌었지만 신포동에서 3~4대를 걸쳐 인천을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시장도 사람처럼 형성과정이 오래고 연륜이 쌓이면 단단한 무게와 기품이 들게 마련이다. 과거의 영화가 언제 있었냐는 듯 한가롭게 장터의 여유를 즐기는 구매 흥정들이 정겨움을 넘어 밉살스럽게 보일 지경에 이르게 되면 볼 장 다 본 사람처럼 어깨가 무거워진다. 어제의 빛바랜 영화가 오늘을 잇게 만드는 자화상이라면 당장 꾸려야 할 내일의 희망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인지. 심심한 우려가 겨울 한파를 동반한 채 신포동 재래시장을 한바탕 휩쓸고 있다. 다들 안녕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