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영종도 기행 1

濟 雲 堂 2008. 9. 25. 23:49

 송무백열(松茂栢悅)이란 말이 요즘처럼 살갑게 들리는 적이 없다. ‘소나무가 무성해지니 잣나무가 기뻐한다.’ 굳이 풀이하자면 이런 뜻인데, 평생 인천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현재 영종도에 대한 변화상을 정의내리자면 ‘송무백열’이란 말 이외에 딱히 떠오를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 땅, 바다. 영종도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이 세 분절음에 희망이 뿌리내리기 전에는, 그저 긴(永) 마루(宗) 섬일 따름이었고 인천이란 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피치 못해 등을 돌리고 사는 먼 형제와 같은 땅이었다. 그만큼 영종도는 인천 역사에 있어서 변방 섬의 일부였으며 왕성한 생존 능력이 증명되지 않은 채, 우리나라 역사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동질적 유전자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자유공원 아래턱 석정루에서 영종도를 향한 시선은 그윽하기 이를 데가 없다. 바다의 표피를 간질거리며 펴오르는 해무, 그 너머 산등성이에 흰 구름을 뒤집어 쓴 산정이 뽀얗게 모습을 드러났다. 백운산(白雲山). 영종도의 진산으로 증명되는 순간, 흰 구름에 싸여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치고는 너무나 절묘한 풍경과 맞닥뜨려진다. 20세기 초 단가 형태로 인천을 노래한 후지노 기미야마(藤野君山)는 ‘인천팔경’이란 시를 통해 영종도와 그 일대의 자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漢江夕照傾 한강의 비낀 저녁 놀

天主晩鐘鳴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松林秋月迎 송림에서 맞이하는 가을 달

鹽河落匯落 염하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永宗晴嵐明 영종의 맑은 남기(아지랑이)

月尾歸帆平 월미에 귀항하는 돛단배

桂陽暮雪淸 계양의 깨끗한 저녁 눈

鷹峰夜雨聲 응봉에서 들리는 밤비 소리


 영종포구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파로 북적거린다. 수천 년 치러온 격랑에 지쳐 나자빠질 법도 한데 거뜬하게 한자리를 지켜내는 모습이 여간 튼실해 보이는 게 아니다. 포구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사람과 바람이라는 뱃사람들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려온다.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현재의 포구에서 평탄한 큰길이 나오는 곳까지를 경계로 포구 일대가 독립된 작은 섬이었다고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원래, 영종(永宗)이란 이름은 경기도 남양부에 있던 군사기지(鎭)를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1653년(효종4)에 이 곳으로 옮기게 됨에 따라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영종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포구 일대의 작은 섬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영종도와는 전혀 다른 군사기지를 뜻하는 말인 셈이다.(실제로 남양에 ‘구영종’이란 지명이 있다. 필자 주)

 

 그러나 영종도의 본래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자연(紫燕)이란 말은 자줏빛과 제비를 뜻하는 두 낱말이 합체된 단어인데, 해석하는 이에 따라 자못 그 느낌이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묘기의 단어로 볼 수 있다. ‘자줏빛 제비’ 또는 ‘자줏빛 도는 제비의 집’ 등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섬이 제비와 연관성이 매우 높았음을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하게 된다.

 “경원정(慶源亭)은 산을 의지하여 건립되어 있고 객관 옆에는 막옥(幕屋) 수십간이 있고 그 주변에는 주민들의 토옥(土屋)이 많았다. 자연도란 명칭은 경원정 동편 산기슭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는 대목이 <고려도경>에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경원정에 묵으며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서긍(徐兢)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는지 그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영종도와 그 환경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외국 자료가 아닐 듯싶다.

 

 포구를 등지고 석화산 남록 방향으로 길게 뻗은 옛길은 여느 농촌의 풍경과 다를 바 없이 고즈넉하였다. 더욱이 이 길은 1663년(현종 4년) 영종첨사 남득화가 계획, 용궁사 주지 문철이 감독해 경기도내 각 사찰의 스님 200여 명을 동원하여 만든 만세교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가 없어 더욱 한적함을 느끼게 하였다. 길이 360척(109m) 넓이 12척(3.6m)의 이 다리는 준공 후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근세에 와서 매립됨에 따라 그 자취가 더욱 더 요원하게 느껴지게 되고 만 것이다. 사람이 길을 만들고 길 또한 사람을 만드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족적이라는 알맹이가 빠져 있는 역사는, 가묘를 만들 놓고 곡을 놓아야 하는 애먼 후손들의 큰 슬픔이라는 생각이 쏜살처럼 흐르고 있었다.

 

 돌팍재를 넘어서야 비로소 흰 구름 아른거리는 백운산 치맛자락에 다다를 수 있다. 멀리 백운산 이미지에 앞서 돌 뿌리에 걸리듯 서슬처럼 다가오는 돌팍재에 대한 날카로운 기억 하나가 불현듯 스쳐지나간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다. 흥선 대원군이 1863년부터 십일 년간의 섭정을 끝으로 분루를 삼키며 넘었다고 전해지는 이 고갯길. 돌 부스러기 투성인 이 고개를 넘으며 절치부심했었음일까. 그래서인지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작명했을 이 고개를 넘나들 때마다, 노기서린 돌멩이 밟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이하응은 이십 대 때인 1840년대부터 십여 년간 용궁사를 드나들었고, ‘석파’도 이 때부터 사용하고 있었음. 필자 주)

 꼬불꼬불 긴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길을 따라 멀리 영종중학교와 농협이 보이는 길목에서, 용궁사로 안내하는 샛길을 쫓다보면 운남동민회관(동민관) 모롱이에 놋쇠로 만들어진 ‘양주성 금속비’를 찾을 수 있다. 십여 기의 선정비 맨 구석자리에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영종첨절제사비’는 화강석을 조탁하여 만들어진 여느 선정비에 비해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75년 9월 일본제국 군함 운요오호가 강화 초지진의 공격과 퇴각 과정에서 영종에 상륙해 영종진을 유린했는데, 조선정부는 불에 타 부서지고 약탈당한 진(鎭)의 복구를 위해 양주성이란 인물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밤낮으로 함께 일을 해가며 주민과 동화된 점도 높이 살 일이지만, 오랜 가뭄에 허덕이는 주민을 위해 정부로부터 궁휼미를 지원받게 하여 생계 안정을 도모하는 등의 선정을 한 것이 이 금속비의 탄생배경이다. 퇴임 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놋그릇 따위를 갹출해 자발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여타의 전관예우 형식으로 만들어진 화강석 선정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사에 있어 가장 귀하게 쓰였던 놋쇠붙이를 자의적으로 모았다는 것에 예와 의리의 지고함을 지키고 기리는 결정적 단서로 봐야 할 것이다.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한 천년 고찰 용궁사를 찾아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외솔과 참솔이 혼재돼 군락을 이루고 있는 언덕길을 접고 에둘러 가는 길을 택한 데에는, 언죽번죽 아름드리로 자란 벚나무 수백 그루에 대한 사견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1924년 4월 24일자 <시대일보>에 “영종청년회는 백운산 동록 용궁사 근처에 앵화나무(벚) 300그루를 기념 식수했다”는 대목이 망막의 배후를 휘젓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출하고 아담한 법당과 요사채가 눈에 박히기 전, 오래돼 보이는 다갈색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천년암 용궁사(옛 구담사)를 보필하듯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수 두 그루’의 신화가 용궁사에도 적용돼 그 격을 갖추고 있었다. 느티나무였다. 교육과 치세의 융성을 위해 열매가 많이 열리는 은행나무를 상징적으로 심는 관공서와 달리 고아한 법당의 그 것을 닮은 느티나무는, 방문자의 교만함을 일깨우듯 굽은 허리춤의 살점마저 비워내고 있는 터였다. 용궁사라고 쓴 편액 왼쪽 아래에는 글쓴이가 누구였음을 알려주는 글자가 또렷해 보인다. 천년이고 만년이고 앞뜰을 지키고 섰을 조선의 풍운아는 제 이름대로 그렇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석파(石坡).

 

 밟고 내딛는 흙이라 해서 모두가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백운산 꼭두머리로 가기 위해서는 백운사의 잔영을 등짐지고 올라야 산길 맛이 난다. 신갈나무 숲 너머 봉수대 터에는, 이미 산의 끝자락을 맛본 사람들이 벌겋게 닳아 오른 얼굴로 황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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