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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냥

濟 雲 堂 2008. 6. 18. 14:26

 

인천, 그러면 아, 성냥! 이라고

대뜸 말하기도 했던 때가 있었다

 

그 만큼 인천은 성냥공장이 유명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명맥이 불티나 라이터 공장으로 변했고

이 마저도 베트남과 중국 필리핀에서 생산되는

여러가지 이름을 가진 개스 라이터(주문자 생산방식에 따라 생산지를 옮김)로

바뀌어 저가로 시중에 돌아 다니다는 판국이 되고 말았다

 

여하튼 인천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에

성냥공장 관련 소규모 업체가 대략 500여 개가 있었던 걸 보면

인천, 특히 동구에 성냥 관련 업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무를 자르는 재제소를 비롯해 액체유황을 뭍히는 업체?(워낙 소규모라..)

말리는 집(차라리 가내 수공업을 하는 집이 낫겠다), 성냥을 담는 집

포장하는 집, 인쇄소, 배달 전문업체 등등이 배다리 문화극장 일대 

전부에 포진해 있었으니 비록 그 규모가 일천하긴 했으되

가히 인천 경제를 주름잡았지 않았을까 

 

길거리와 골목에 양회 종이를 널게 깔아 놓고

가지런히 널어서 말려 놓은 광경이 어릴 적 추억으로 남았지만

간간히 불꽃처럼 펴오르는 가물거리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성냥의 본래 이름은 석유황이다

石硫黃 말 그대로 돌처럼 굳힌 유황인데

쓰임새가 와전돼 성냥이란 고착어가 된 보기 드믄 경우의 말이다

 

인천에 성냥 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17년 경이다. 인천에 개항의 문호가 공식화 되던 1883년

그로부터 2년 후 독일에서도 꽤나 큰 기업이었던

Meyer & Co(마이어 양행 또는 세창양행)이 인천에 영업소를 개설하면서

세창성냥이 처음 우리 곁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세창성냥은 중국 상하이에서 제조돼 인천으로 건너오게 됨에 따라

물에 젖는 등 여러 문제로 불편하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근대문물로서 그 자리가 매우 지대한

위치에 있었다

 

헌데 워낙에 고가이다 보니

장사의 어려움이 없질 않았으나

사람들의 구매 심리를 본격적으로 발동케 하는 편리성 때문에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그런 틈을 이용해 일본인들이 저가의 성냥을 가내 수공업 형태로

만들어 팔다가 본격적으로 공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원자재 수급 문제로 고전을 하다가 훨씬 이후인 1917년에 비로소

본격적인 성냥공장을 만들게 됐는데

현재 문화극장 일대의 너른 지역이 바로 성냥공장 지대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위의 성냥곽을 보게되면

전모를 통해서 한 시대를 유추해 낼 수 있는

키워드들이 곳곳에 발견되기도 하는데

좀 전에 댓글에서 뤼댜 님이 얘기 했던 반공방첩 즉

공산주의를 반대한다와 간첩을 막아내자 라는 의미가 축약된 단어라든지

가정용, 대덕용 등이 눈에 띄고

사진 상으로 보이진 않지만 오른 쪽 상단에

제2차전국모범기업업체당선' 이란 자축 메시지가 있는 게 눈에 띈단 말인즉

가정용은 넘어간다치더라도 대덕용(大德用)의 의민 뭔가, 이를 추적해 보면

남을 높이 부르는 말, 또는 선물용이란 말이 함축된

요즘에 와서는 생소한 말처럼 들리는 용어가 눈에 띄고 있다

 

전화번호의 사용을 두고 추론 했을 때

전국의 전화가 자동전화 교환방식으로 전환되던 때에

받은 전화임을 알 수 있는데

아마 이 전화 번호를 받기 전에는 교환수(교환)가

수화기를 들면 상대방 전화를 연결해 주는 세 자릿수 전화 번호였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내가 기억하는 우리집 전화번호의 변천은 첨엔 212번 이었고

그 후 2-5801, 다시 72-5093으로 바뀌어 가는 예가 그렇다

 

성냥통 하나에 이렇게 여럿의 문화 키워드가 내장돼 있다는 사실은

곱씹어 볼 수록에 흥미진진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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