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박송-
무슨 소리 이토록
가슴 설레어
내 홀로 저무는 거리에 서서
호궁(호궁)소리 따라
청관 길 오르면
이국의 정취가 향수처럼 스민다
컴컴한 이곳
반 백년 역사
이어온 거리
균열진 담벽에사
무슨 사연 있기에
불현듯 옛정 새롭혀
화평동 저기는 갈밭이고
낚배만이 소리없이 드나며
무던히도 인정 아름답더이다
낯선 연륜 뒤네미 속에
여기
제물포의 애수가 크고나
<여정> 196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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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괴물이 온나라를 강타했다
무참히 얻어터진 사람들은 정신도 채 차리기도 전에
일제강점에 얼 마저 빠져버리고 말았다.
근대시대를 대략 이렇게 표현하는 학자들이 부지기수다
서양처럼 필요충분 조건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산업의 새로운 양상들이 발아하던 무렵에 이른바 산업혁명이 태동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러운 일상을 보냈다거나 불행한 삶을 살지는 않았겠지만
절대적 강자 이미지들을 잔뜩 싣고
바다의 부랑아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깡패로 때로는 우호적인 모습으로
전 세계를 떠다니다 드디어 조선이란 나라에
당도한 이양인(異洋人)들.
근대의 시간은 이렇게 시작됐다
미처 준비가 안 된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약자의 수그러듦이었지만
더 많은 배를 채우려 했던 이양인들에게
근대의 시간대는 탐욕과 약탈과 전도라는 인간 본능에 충실했던 시기였다
인천이 다른 도시보다 양관(洋館)이 많은 이유는
수도에 인접해 있다는 점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부산, 목포, 군산, 마산 등에 일본식 가옥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면
인천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풍의 건물들과 함께
근대 건축의 실험적 설치 공간으로서 시도된
양관들이 많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산다 해도
인천을 가보지 못했다면
인텔리겐챠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던 시기가
불과 얼마 전이다
그래서 인천을 읊는 문인들이 저마다의 시집에
인천을 제법 많이 출연시키는 이유가 거기 있다.
1962년에 쓴 박송 시인의 <제물포>라는 시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동문학을 밥벌이로 살아가던 한 작가는 제물포를 이렇게 노래한다
호궁소리따라 청관 길 오르면,
화평동 저기는 갈밭이고...
호궁(胡弓) 소릴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
호궁은 우리나라의 해금 비슷한 악기라 치면 이해가 쉽다
인천의 청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유습과 다른 미묘한 차이점들이 제법 숨어 있은 걸 쉽게 발견하게 된다
제사 때, 만두처럼 생긴 둥근 빵에 콩 세 쪽을 박아서 찐 빵이라든지
색색의 물감을 이용해 밥을 쪄댄 밥이라든지
정월에 부추와 밀가루를 반죽해 빚은 물만두
춘장 볶는 냄새, 추석 명절 월병(月餠)의 소로 넣는 갖가지 재료들의 향 등등은
근접한 관계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실제 모습들이다
여하튼 호궁 소린, 애처롭기는 그지없고
바이올린의 선율처럼 다양한 음색을 내는데 아주 그만인 악기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서양 깽깽이 같은 호궁 소리를 굳이 빚대어
청관을 노래했다. 추억의 심금을 울리던 세대에게는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청관의 이국적 풍습은 제물포 항구 일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볼거리였고 당대의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인텔리겐챠들의
문학적 양념 덩어리였던 것이다
지금은 화평동 냉면, 즉 세숫대야 냉면이 유명하기로 소문나 있는 곳이
화평동이다. 원래 화평동은 화동과 평동을 합쳐서 만든 지명인데
꽃나무가 무성하고 너른 초원(밭)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과거 1899년 아니, 엄밀히 말하면 1897년부터 작업에 들어간
경인철도 공사로 절반이 뚝 갈라지기 전에
이 곳은 작가의 말처럼 갈대가 무성하게 뻗친 버려진 땅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작가가 이 시를 쓴 1962년까지만 해도
거친 가슴을 지닌 황톳골이었을 것이다
화평동 굴다리 공사가 1968년에 새롭게 조성되고부터는 좀 달라지겠지만
배들이 넘나드는 게 시야에 차 들어오고
출처가 너무도 확실한 바닷물도 작가의 후각을 자극했을 것이다
컴컴한 이 곳
반 백년 역사
이어온 거리...에 낯선 연륜 뒤네미 속에
여기
제물포의 애수가 크고나
연 이은 대목의 조합은 역시 작가의 역사적 소회와 더불어
인식의 갈피를 갈음케하는 부분이다
무엇이 제물포를 애처롭게 만들었고
나아가 식민지를 어렵사리 벗어난 지식인의 감회가
제물포의 과거를 서럽게 뜯어내고 있을 따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