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축제란 무엇인가? 딸꾹~!

濟 雲 堂 2008. 4. 14. 16:11

 

 뜬금없이 게워내는 술판의 넋두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 오해가 백주대낮에 생사람 잡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재차 ‘축제란 무엇인가’를 뇌까려 본다. 바야흐로 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을 취하게 만드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폈기 때문이다.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형태로든 형식과 의미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제(祭)의 행위를 빌어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불완전한 인생을 극복하려 한다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삶의 불안 요소를 극복하는 대안적 행태는 이미 여러 종교적 행위를 통해 우리네 가까이 정착해 왔다. 그러나 절름발이다. 사회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엄숙주의에 치우쳐 균형감이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일상은 더 불안하고 삶 또한 재미를 잃어 가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 대희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기의 열쇠 말은 ‘문화’였다. 문화라는 정체의 그림자는 의당 ‘축제’라는 등식으로 자리 매김하여 온 나라가 축제 열풍에 휩싸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듯 지역적 특색을 내세워 너끈 잡아 30여개로 추산되는 축제가 판을 벌이게 되는, 그야말로 축제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먹을거리를 필두로 볼거리, 놀거리 등은 인천에서 열리는 축제의 단골 차림표이다. 그러나 전국적인 현상이다.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소동(小同)하면서 대이(大異)하다는 주최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이다. 연예인을 불러 모으고 각설이를 등장시키고 각 기관장들의 지루한 축사를 들어야 하는 요식행사를 마치면 축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그저 구경꾼이 되거나 호객행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그 서글픈 내면인 것이다.

 

 인천을 큰 그림으로 보면 해양 관련지역과 내륙 관련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역사적 전거들을 놓고 재편했을 때, 고대문화를 위시해 우리네 역사의 전 층이 골고루 분포돼 녹록치 않은 깊이를 간직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역사를 더듬어 매만질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셈이다. 이를 바탕삼아 온고지신 자세로 그 의미를 빌어 만든 축제는 일단은 외형적 안정감과 정당성이 주어진다. 지리적, 역사적 환경을 매개로 하거나 생활환경을 근저에 두고 열리는 축제가 이에 포함된다. 꼼꼼히 따져보니, 인천이란 이름을 걸고 행하는 축제는 모두 합당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이들 축제에 참여해 보면 한결 같이 이죽거리는 마음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는다.

 

 우리네 전통 축제의 한 형태인 당산제는, 마을에 중심이 되는 산을 당산 삼아 당산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셔놓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행해지던 송도 동막제의 도당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슴푸레 살아난다. 작은 사당을 지키고 서있던 느티나무 한그루와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초막 두 채. 말인즉, 동네의 모범적인 어른을 뽑아 ‘당골’로 삼고 동네 사람들 각자에 배정 받은 역할과 음식을 모아 정갈하게 늘어놓고 흐드러지게 한 판 놀아 보자는 말이다. 먼 옛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우리네 조상들이 삼일 낮밤을 치르던 음주가무고(飮酒歌舞敲)는 못할지언정 모두의 참여와 치성이 합해진다면 동네의 번영과 안녕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해서이다.

 

 축제란 무엇인가. 아니, 축제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그 대답은 외려 간단하다. 만물이 생장하는 춘삼월에는 ‘꽃들에게 물어 볼’ 일이다. 녹음지고 무더위가 들면 ‘산과 바다에’ 물어 볼 일이다. 그 다음에 축제의 목적과 오랜 준비 그리고 재미를 풀어 넣는 것은 양념이다. 전제조건은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축제여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지신밟기축제를 18년 밖에 하지 못한 경험자의 고언이다. 거버넌스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관주도형 축제는 일종의 문화 폭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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